[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56)가을밥상의 해묵꼬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56)가을밥상의 해묵꼬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1.10.12 10: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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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미를 대신하던 콩잎
그리운 ‘복이까지’ 국

반찬을 ‘해묵꼬’라고 불렀다. 그것을 반찬으로 해서 밥을 먹는다는 의미의 ‘해 먹을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많은 식구에 삼시 세끼 밥 해 먹일 걱정으로 주부가 “뭐 해 먹일꼬?” 한탄한 데 따른 것일 수도 있겠다.

고된 노동에 비해 농부들의 해묵꼬는 빈약했다. 모택동이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고(1927년 8월 7일 한커우(漢口)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에서) 했다던가, 소평마을 해묵꼬 대부분은 ‘채전 밭’에서 나왔다. 농부들은 집집마다 뒤뜰이나 담벼락 밑 한쪽에 작은 채전(菜田)을 일궜다. 돈 들 일이 없었다. 채전이 없는 사람은 앞거랑의 양쪽 비탈 적당한 데 채소를 갈았다. 먼저 ‘뛰져(뒤져) 먹는’ 사람이 임자였다.

앞거랑 둑 밭에 들깻잎이 노랗게 물들어 있다. 정재용 기자
앞거랑 둑 밭에 들깻잎이 노랗게 물들어 있다. 정재용 기자

가을이면 무생채와 콩잎무침 그리고 들깻잎무침이 밥상에 올랐다. 무생채는 채독(菜毒) 때문에 서리를 몇 차례 내리고 난 뒤였다. 콩잎과 들깻잎은 양념간장으로 무친 것으로 “절였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무릉산, 어래산, 양동산 줄기를 타고 가을이 내려오면 벼와 콩잎과 들깻잎은 노랗게 물들었다. 아낙네들은 갱빈 밭으로 가서 잘 익은 잎을 따서 한 줌이 되면 지푸라기로 묶었다. 그 단을 작은 단지에 넣고 소금물을 부었다. 그리고 그 위에 넓적한 돌을 얹었다. 여름 동안 연한 잎을 따서 밥솥에 찌거나 된장 푼 쌀뜨물에 삭혀서 쌈으로 먹던 콩잎이었다. 된장 속에 박아두었다가 ‘지’(장아찌)로 먹기도 했다. 

삭힌 단풍 콩잎은 반찬을 할 때마다 한 단씩 건져내어 물기를 짜내고 고춧가루 간장으로 버무려서 먹었다. 먼저 밥을 한 숟갈 입에 떠 넣고 콩잎의 잎자루를 손으로 잡아 입에 넣었다. 그리고 위 아랫니로 훑었다. 밥 다 먹고 나면 각자의 앞에는 생선뼈를 발라낸 것처럼 잎맥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누군가 “아따, 가자미 많이 먹었다”라고 했다. 한바탕 웃음이 일었다.

이 즈음 도시락 반찬은 벼메뚜기 볶음과 콩잎무침이었다. 등교해서 책보자기를 풀면 간장물이 배어나와 책과 노트가 엉망이었다. 책보자기도 얼룩덜룩했다. 책보자기를 줄여서 ‘책보’라고 불렀다. 남자는 책보를 어깨 위에서 반대쪽 겨드랑이 밑으로 매고 여자는 허리에 동이고 걷던 때니 당연한 결과였다.

놉을 들여서 일을 할 때는 반찬이 완전히 달랐다. 모내기 때는 놉을 여럿 들여야 했기에 부엌일 도울 사람을 구해서 음식을 장만했다. 부잣집은 쇠고기 국을 끓였다. 없는 집도 가자미 국을 끓이고 꽁치를 구웠다. 꽁치를 ‘삼마’(さんま)라고 불렀다. 비가 내리면 오후 참은 뜨끈한 미역국에 찹쌀수제를 넣은 ‘찹쌀깔때기’였다. 벼 베기 때는 갈치가 제철이었다. 갈치구이는 말할 나위 없고 무 넣고 찌개를 끓이면 칼칼한 국물이 일품이었다. 무나 시래기를 넣고 가자미 찌개를 끓이고 고등어조림을 했다. 

안강은 포항이 가까워서 해산물이 풍부했다. 모자반, 청각, 미역, 곰피 등 해조류와 꽁치, 고등어, 전갱이, 전어, 오징어, 노가리, 도루묵, 대구, 명태 등 생선 그리고 각종 어패류와 갑각류였다. 가난한 농부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곰피와 한물간 고등어를 골랐다. 멸치도 반 포대 샀다.

곰피는 떫고 잎이 두꺼워서 오래 물에 담가 떫은맛을 우려내고 양배추와 함께 채썰기 해서 무쳐먹었다. 양배추를 ‘칸낭’(かんらん, 甘藍)이라고 했다. 겨울에는 무를 역시 썰어 넣었는데 고추장과 된장을 넣고 비벼먹으면 꿀맛이었다. 회는 곱빠리 회나 물가자미 회를 첫손가락으로 꼽았다. 새끼상어를 ‘곱빠리’라고 불렀다. 물가자미 가늘게 썰고 거기에 채썰기 한 무를 넣고 초간장에 함께 버무렸다. 무 때문에 주로 서리 내린 후에 먹었다. 오징어 회도 맛있었다.

생일이라 해서 특별한 것은 없었다. 하루 종일 일하고 해 저물녘에 자전거 타고 읍내 나가서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사다가 생일날 아침에 국을 끓여 먹는 게 전부였다. 찰밥을 했다. ‘밥그릇 높으면 생일인 줄 안다’는 속담 그대로 고봉(高捧)이었다. 시장에 나갈 시간이 없으면 집에서 기르던 닭이나 토끼를 잡았다.

큰거랑에 가면 다슬기와 재첩 그리고 물고기가 있었으나 가을이 되면 물도 차고 잡을 여가도 없었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미꾸라지를 잡거나 메뚜기를 잡아서 장에 내다 팔았다. 이렇게 파는 것을 ‘돈 산다’라고 했다. 앞도랑이나 샛도랑에는 미꾸라지가 많았다. 비가 내릴 때 큰거랑에서 올라오고 고래전 논에서 물 따라 흘러내린 미꾸라지였다. 비가 와서 도랑에 물이 많을 때면 반두로 잡고 가을에는 물길을 옆으로 돌리거나 잠시 둑을 쌓아 막고 진흙을 뒤져서 잡았다. 1967년 9월 미꾸라지 1사발 값은 150원으로 돼지고기 2근 값이었다. ‘백계댁’(벽계댁)은 미꾸라지 잡는데 선수였다.

벼가 누렇게 익으면 벼 베기를 앞두고 물을 뺐다. 멀리 오른 쪽에 형제봉 산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벼가 누렇게 익으면 벼 베기를 앞두고 물을 뺐다. 멀리 오른 쪽에 형제봉 산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논에서 물을 뺄 때는 통발을 논에 대서 잡았다. 해거름에 남몰래 가서 통발을 놓고 이튿날 아침 일찍 나가서 거뒀다. 벼 잎에 묻어있던 이슬이 종아리를 적셨다. 추어탕에 넣어먹는 향신료 초피(椒皮)를 ‘제피’라고 불렀다. 제피 잎은 고추장에 넣어 장아찌로 먹기도 했다. 초피와 비슷한 산초를 소평마을 사람들은 ‘난두’라고 했다. 난두기름으로 밀떡을 구워먹으면 구수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가난한 농부네 집에 모처럼 광어 국이 상에 올랐다. 상이 그득 했다. “와, 해묵꼬 많다” 아이들이 혹탁을 했다. 혹(惑)하여 먹는 것을 그렇게 불렀다. 다 배불리 먹고, 농부는 아내가 건더기는 식구들 다 퍼주고 국물만 먹었다는 것을 알았다. 농부가 한탄조로 말했다. “복(福)이 까지다” 이 말을 들은 여섯 살짜리가 간청하듯 말했다. “엄마, ‘복이까지’ 또 해 도이(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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