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당익장(老當益壯) 류우복 시인
노당익장(老當益壯) 류우복 시인
  • 방종현· 김수남 기자
  • 승인 2021.09.29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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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米壽)에 시집을 내다

 

米壽의 류우복 시인    사진 방종현 기자
米壽의 류우복 시인. 방종현 기자

 

류우복 선생은 1934년 경북 군위군 소보면에서 출생했다. 소보면에서도 시오리를 더 들어가야 하는 오지(奧地)인 내 이리(우던 골)에서 3녀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시오리 길을 걸어 나가야 학교가 있다. 낮에도 늑대가 출몰하는 오지라 다른 아이들보다 늦은 나이에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바로 2학년으로 월반을 했다. 그 당시에는 그게 가능했다. 졸업할 때까지 성적이 1등이었고 반장을 놓치지 않았다.

류 시인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의 12세 손으로 어려서부터 시심(詩心)이 깊었다. 고등학교 3학년인 1954년 경주에서 제1회 서라벌 예술제에 참가하여 '엄마의 기일'이라는 시가 당당히 우수작으로 뽑혔다. 그때부터 문학을 향한 화두는 늘 마음에 담고 있었다. 그 염원이 팔순이 되어서야 시인으로 등단하고, 미수에 시집 '가슴벽에 걸어둔 달빛풍경'을 출간하게 했다.

어느 볕 좋은 날 국립대구박물관 야외 벤치에서 류 시인을 초청 인터뷰를 했다. 미수(米壽) 연세인데 손수 운전해 왔다.

-건강 비결을 말씀해 주세요.

▶매일 아침 5시면 자리에서 일어나 집 앞 달성고등학교 교정을 1시간 30분 정도 천천히 걷습니다. 코로나 사태 전에는 두류공원을 걸었습니다. 소식(小食)하고 밥은 100번쯤 씹고 넘깁니다.

-어린 시절 들려주세요.

▶고향이 산간벽지인 군위 소보면에서도 시오리는 더 들어가야 하는 두메산골이었지요. 자전거도 쉽게 통행할 수 없는 불편한 오지 마을에 수시로 늑대가 출몰하고 험한 산을 넘어야 통학할 수 있었습니다. 학교에 갈 엄두도 못 내고 적령기 아이도 한둘 뿐이었어요. 일제강점기 때 열 살이 되어 입학하려 했으나 나이가 많다고 퇴짜 맞고 꼴망태 목동이 되었습니다.

-국민학교 입학 과정을 알려주세요.

▶1945년 까칠복숭아 익을 무렵 아랫마을 사람들이 풍장을 울리며 올라와서 춤을 추며 외쳤습니다. 해방이다! 해방이다. 나도 멋모르고 그 대열에 끼였지요.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어 이듬해에 초등학교 2학년에 편입하여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였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군위중학교에 입학하자 6·25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학교 건물은 두 동강 나고 선배들은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하였습니다. 신입생은 김규련(수필가) 선생님의 지도하에 웅변으로 선배들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외치기도 했지요. 그 후 6.25사변을 겪으며 연달아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가세가 극도로 기울어 중고등 학교도 제대로 졸업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라 고학을 결심하고 중고등 학업을 야학으로 마쳤어요. 그러는 중에도 고학으로 공부하며 고등학교 3학년인 1954년 경주에서 제1회 서라벌 예술제에 참가하여 '엄마의 기일'이라는 시가 우수작으로 뽑혔습니다.

-사회생활을 들려주세요.

▶대구로 이주하여 영남대 정경학부를 다니며 고학으로 채소 행상도 하며 동생들도 건사해야 하는 힘든 시절을 보냈습니다. 동족상잔의 6·25를 겪으며 부모님을 여의고 동생 넷을 돌보아야 하는 소년가장이 되어 어려운 세파를 오롯이 몸으로 막아냈습니다.

-성공담을 들려주세요.

▶살아남기 위해서 채소 장사도 하고 방문판매도 하면서 사회생활에 적응해 나갔습니다. 전자제품 가정 방문 판매업에 뛰어들어 100여 명을 거느리는 거대 조직으로 성장시켰습니다. 이후 여러 경험을 쌓으며 거래처로부터 성실함을 인정받아 전자제품의 OEM 방식으로 제조공장을 설립했지요. 제조 판매가 원활하게 이루어져 어느 정도 부가 축적되었습니다. 이어서 주식회사 동서물산을 설립하여 대표이사로 취임했습니다.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경제계에서 신망도 얻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어 고향을 위해 진입로 확장사업 등 모교를 위해 도움도 주었습니다.

-등단작가가 된 사연을 듣고 싶습니다.

▶IMF가 와서 사업을 접고 은퇴하여 학창 시절 품었던 문학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1회 서라벌 예술제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고 문학이란 화두는 늘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대구 문인 협회장을 지낸 공영구 시인이 하는 수성문화원 '시 창작 교실'에서 3년을 공부했습니다. 드디어 2016년 '월간 한 비'를 통해 내 나이 82세에 늦깎이로 등단을 했습니다.

-신한국 운동본부의 노래 가사를 지으셨다지요? 신한국 운동본부를 알려주세요.

▶신한국 운동은 회원 1,000여 명이 있는 단체입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나라는 사회 전반에 걸쳐 많은 발전을 이루어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되었으나, 현실은 국론이 분열되고 사회는 온갖 부조리가 만연합니다. 국민은 진영으로 나뉘어 불신하고, 정치는 국가와 국민은 안중에도 없이 당리당략에만 몰두하여 장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새로운 대한민국의 건설이 필요합니다. 전 국민이 하나로 뭉쳐서 '신한국운동'을 일으켜 제2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야 합니다. 신한국 운동본부는 서정학 선생이 대표로 있고 심후섭 선생이 인성 대학원 원장으로 있습니다.

류우복 시인은 올해 88세로 미수(米壽)를 맞는다.  지금도 아침 산책길에 펜과 메모지는 꼭 챙겨서 나간다며 시상이 떠 오르면 바로 메모를 해 둔다고 한다. 인터뷰 내내 말씀도 조곤조곤하고 인상이 참 편안하다. 대구 문인협회. 군위 문인협회 수성구 문인협회 등 문단에서 활동 중이다. 2015년 한국 문학비평가협회의 '좋은 시 명시인 전' 공저(共著)와 2016년 '한국현대대표 서정시'를 공저하고, 드디어 2021년 '가슴벽에 걸어둔 달빛풍경' 시집을 상재했다. 중구청, 수성구청, 수성도서관 등에서 류 시인의 시집 '가슴벽에 걸어둔 달빛풍경'을 구매하여 비치해두고 있다.

심후섭 대구 문인협회 회장은 '가슴벽에 걸어둔 달빛풍경' 발문에서 “어린 시절 고향의 이야기에서부터 8·15 광복과 6·25 그리고 4·19 및 5·16등 격랑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파란(波瀾)한 세월을 겪으면서 켜켜이 쌓아 올린 삶의 흔적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고 적고 있다. 류 시인의 시를 읽으면 치열하게 살아온 시인의 삶을 볼 수 있다. 꾸밈없이 보여주는 자서전 같기도 하고 시인의 동심과 살아온 모습이 모두 투영되어 온다.  저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고 행복해진다.

류우복 시인이 작시하고 한국 작곡가 협회 회장을 역임한 국립 군산대학교 예술대학 윤상렬 교수가 곡을 지었다.

신한국 운동 찬가 (3절 중 1절만 소개)

동해의 파도 소리 새 아침을 여는 소리

금강산 맑은 정기 정의로운 길을 튼다

삼천리 옥토 위에 지혜로운 우리 겨레

빛나는 신한국이 웃음꽃을 피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