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의 '진달래꽃'
김소월의 '진달래꽃'
  • 김채영 기자
  • 승인 2019.03.22 14:18
  • 댓글 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19-03-13 제주도 이중섭거리에서
2019-03-13 제주도 이중섭미술관 앞에서

김소월의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매문사(賣文社) 1925년

 

 

중국을 통하여 백두산에 오른 적이 있다. 미니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 차창 너머로 본 진달래군락이 잊히지 않는다. 그동안 보아온 분홍과는 색감의 차원이 달랐다. 꽃불이라도 붙은 듯이 핏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영변 약산 진달래일지 모른다는 엉뚱한 상상까지 했다. 그런데 오늘 ‘북, 영변 핵시설 여전히 가동’이란 지나간 기사를 읽으며 생각이 복잡해진다. 진달래가 방독면을 눌러쓰고 견디는 것은 아닌지, 뜬금없는 걱정이 앞선다. 진달래의 안녕은 곧 우리의 안녕과 맥을 같이하지 않는가. 이 오지랖을 단순 무지의 비약이라 매도할 수만은 없으리라. 어쨌든 영변 핵시설 주변에 오염 농도가 심각해서 풀도 자라지 못한다는 누군가의 말이 와전이면 좋겠다.

해방 무렵 북엔 ‘소월’, 남엔 ‘목월’이란 말이 회자 됐다고 한다. 대중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방증일 거다. 소월 탄생 100주년이 지난 지가 언젠데 그의 시가 변함없이 먹혀든다는 것은 그만큼 독자층이 두껍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다. 더구나 ‘진달래꽃’은 국민 詩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지 않을까? 그만큼 전문가들의 분석이나 감상평도 손쉽게 만날 수 있는 게 사실이다. 구태여 이런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는지 모른다. 하지만 제주도 여행 중에 때 이른 진달래를 보자마자 소월의 시가 떠오른 것을 어쩌랴. 무릇 세상의 모든 진달래는 소월로 귀결될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하늘거리는 꽃잎이 혹독한 겨울을 견딘 생의 무게에 편승하여 나를 시 속으로 끌어당겼다.

이별을 전제한 정황들로 이루어진 시다. 여성적인 어조의 화자는 이미 찾아온 이별이 아니라 언제 다가올는지 모를, 앞날의 이별에 대한 염려를 미리 하는 것으로 봐도 무방하겠다. 아직 분명하지 않은, 가정식 작법을 미래시제 형식이라 일컫는다. 반복적으로 이어진 ‘〜오리다’는 리듬감을 형성하면서 강조 의미를 지님과 동시에 역설적 심리묘사의 장치로 읽힌다. ‘나’와 ‘진달래’를 동일시 해보면 밟고 가라는 표현에 비장미마저 느껴진다. 죽어도 눈물 흘리지 않겠다는 의지는 가지 말라는 말보다도 더 강렬한 마음의 표식이 아닐까 싶다. 이런 당찬 자세가 임이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의 형상화로 승화된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수미상관 형태를 취하면서 한 번 더 애절한 정한을 각인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