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근대골목] 모명재와 두사충 그리고 담티고개
[대구근대골목] 모명재와 두사충 그리고 담티고개
  • 안영선 기자
  • 승인 2021.09.1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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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정각 이정표. 안영선 기자

 

대구광역시 수성구 달구벌대로 525길 14-21에 모명재가 있는데, 지하철 2호선 만촌역에 내려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모명재는 두사충의 후손들이 명나라를 그리워한다는 뜻을 담아 모명재라는 재실을 지어 두사충을 기리는 곳이다.

모명재를 가기 전에 명정각이 있다. 명정각은 조선 순조23년(1823)에 태어나 고종 30년(1893)에 세상을 떠난 두한필(두사충의 7대손)의 효행을 알리기 위해 조정에서 정려를 내린 것이다.

두한필의 효행을 기리는 명정각. 안영선 기자

명정각에서 100여 미터쯤 가면 두사충을 기리는 재실 모명재가 있다. 모명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팔작지붕 기와집인데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이 있으며 앞쪽에는 반  칸 규모의 툇마루가 있다.

두사충의 재실 모명재. 안영선 기자

두사충은 중국 두릉(서안)두씨 시성 두보의 21대 후손 두교림의 아들이며 명나라 최고의 풍수지리가로 본국에서는 상서 벼슬을 지내다가 1592년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 이여송의 수륙지획주사로 조선에 와 지리참모로 활동했으며, 또 1597년 정유재란 때 명나라 수군 진린과 함께 조선의 남해로 출전하게 되어 이순신 장군을 만났다. 해전에서 승리와 서로의 믿음으로 두 사람은 우정이 깊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한시 봉정두복야를 지어 주었으며, 두사충은 현재 충청남도 아산의 금성산 기슭에 이순신 장군의 묫자리를 봐줬다.

모명재 툇마루의 현판들. 안영선 기자

 

본국으로 돌아가는 명나라 군대를 배웅한 두사충은 임금을 알현하고, 한양이 아닌 경상도 지금의 대구가 풍속이 아름답고 인심이 따뜻하여 머물기에 부족함이 없겠노라고 임금에게 고하여 두 아들과 함께 "하루에 천냥이 나오는 명당"에 자리를 잡았다.

후에 하루에 천냥이 나오는 명당에는 경상감영이 들어서고, 두사충은 계산동으로 옮겨 4천 여 평의 땅에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기르고 명주 만드는 법을 알려 주며, 뽕을 따며 지내는 어느날 담 너머 집에서 절구를 찧고 있는 여인을 보고 마음에 두었다. 아버지의 속마음을 눈치챈 아들은 둘의 사랑을 이어 주었다. 여기에서 뽕도 따고 님도 본다는 말이 생겼다.

두사충은 늘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북쪽 하늘을 바라보곤 했는데 계산동에서 거처를 옮겨 대명단(지금의 대구고교 자리)을 설치하고 대명동이라 이름짓고 사람들은 대명처사로 불렀으며 명을 그리워 한다고 호를 모명으로 삼았다.

두사충은 풍수지리에 밝아 일찍부터 당신이 묻힐 곳으로는 지금의 수성구 고산 일대를 잡았다. 어느날 묘터를 아들에게 알려 주려고 고개에 이르렀으나 기침과 가래가 심하게 끓어 그 위치를 알려주지 못하고 발길을 돌린 그 고개를 '담티고개'라 부르고 있다. 그 뒤 두사충은 형제봉을 가리키며 "저 산 아래 묘를 쓰면 자손이 번창하니 묻어 달라"고 하여 쓴 묘 자리가 지금의 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