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풀 시니어] (128) 노년의 자존심
[원더풀 시니어] (128) 노년의 자존심
  • 김교환 기자
  • 승인 2021.09.13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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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노부부가 부부 싸움을 했다. 그날부터 며칠간 두 사람은 입을 닫고 대화가 없다. 때가 되면 할머니는 밥상 차려 놓고 TV보다, 식사 마칠 때쯤 말없이 숭늉을 떠다 놓는다. 불편한 생활이 이어지던 어느 날, 할머니가 마른빨래를 정돈해서 옷장에 넣고 있었다. 말없이 지켜보던 할아버지가 옷장 문을 열고 뭔가를 찾기 시작한다. 여기저기 뒤지며 부산을 떨던 할아버지는 옷장 속의 옷들을 하나둘 꺼내놓기 시작한다. 화가 난 할머니 “도대체 뭘 찾느라고 그러는데요?” 그제야 할아버지 웃으며 “이제 서야 임자 목소리를 찾았구먼” 할아버지의 지혜로운 화해 요청에 할머니도 그만 따라 웃고 말았다. 결국 작은 자존심 때문에 서로 간 며칠 동안 불편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작은 싸움이 큰 싸움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이유는 자존심 때문일 경우가 참 많다.

은퇴 후의 인생은 우선 나이 들면서 거동이 불편해지고 따라서 언행이 느려지고 늙음에 의한 외형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호감을 받지 못하지만, 그래도 감정은 젊은 시절이나 변함이 없다.

사회 망이 급격히 좁아지면서 또 다른 자기 관리에 의한 사회생활이 시작된다. 우선 주위로부터 무시당하기 싫은 마음에서 자기인정의 욕구가 강하게 일어나고, 자기존재를 과시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과거의 경력이 무슨 벼슬인 양 입만 열면 자기 자랑으로 과거의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목에 힘을 주는 착각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의 자기과시욕은 본능이라고 하지만 과거의 모습이 여생을 살아가는데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과거는 이미 흘러간 물이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앞으로의 시간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노년세대는 유교문화의 그늘에서 태어나 유교정신이 머리에 박혀 있는 세대이다. 물론 그 정신 속에 윤리도덕과 인성교육을 위한 바람직한 면도 있지만, 개인보다 타인과의 사회적 관계를 중시하고 대의명분을 중히 여기며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삶의 방식이 자연스럽게 몸에 익숙해 있다. 자신보다 남의 눈을 먼저 의식하는 타인지향의 위신과 체면. 내면보다 외형의 겉치레 중시와 허례허식의 폐해 등 문제점들이 개인의 자존심과 연결되어, 자신의 불편보다도 남의 눈을 더 의식하는 잘못된 자존심의 삶이 정착된 모습이다.

‘신 포도를 먹고사는 사람들’이란 이솝우화가 있다. 높은 가지 위의 포도를 따먹으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던 여우들 중 천신만고 끝에 올라간 한 여우가 다른 동료들이 쳐다보면서 부러워하는 바람에, 자기과시의 자존심에 부풀어서 시고 떫은 포도를 맛있는 척 먹고 위궤양으로 죽는다. 우리는 신포도 이야기와 같은 명예, 권세, 허세 등으로 스스로를 포장하여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는 않는지. 이는 결국 자기관리의 문제인데 남이 생각하는 나와 자신이 생각하는 나는 다를 수밖에 없다. 남들은 내 모습의 보고 싶은 면만 보고, 나는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면만 보여 주려고 애쓴다. 그래서 누구나 남보다 뛰어난 좋은 사람의 틀 속에 자신을 맞춰 넣으려고 하니. 결국 자기위선에 빠지게 된다.

법정 스님은 수필 ‘버리고 떠나기’에서 나는 누구도 닮지 않은 나다운 내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진짜 내가 아닌 위장된 나를 버리라고 했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진정 노년의 자존심이란 스스로의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오랜 세월 동안 경험으로 쌓은 삶의 철학을 바탕으로 자기감정을 스스로 이기는 방법까지도 터득해야 할 것이며 위신, 체면, 그릇된 자존심 때문에 귀중한 내 삶에 부담이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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