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의 계절에 설악산의 ‘이름 모를 자유용사의 비’를 생각하며
벌초의 계절에 설악산의 ‘이름 모를 자유용사의 비’를 생각하며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1.09.08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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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이 빛도 없이 나라 지킨 용사들
비(碑) 진입로와 주변에 잡초 무성
화강암으로 말끔히 포장하기를

지난 8월 마지막 주말에 설악산을 찾았다. 수학여행 때 추억이 새로웠다. 가을장마 중이라는데도 다행히 날씨가 좋았다. 비선대 가는 길은 그동안 내린 비로 삼림이 울창하고 계곡에는 많은 물이 흘러 생기가 넘쳤다. 중간쯤 이르렀을 때 오른쪽으로 ‘이름 모를 자유용사의 비’가 보였다. 입구에 안내판이 서 있었다.

“6.25전쟁 시 설악산전투에서 중공군을 맞아 용감히 싸운 수도사단, 제1사단, 제5사단의 순국장병과 군번없이 참전하여 산화한 학도결사대, 호림(虎林)부대 용사들의 넋을 위로하고 공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였다. 입구에서 비(碑)로 가는 길에는 자갈이 덮여 있었는데 잡초가 무성했다. 좌우 뜰도 마찬가지였다.

설악산, 비선대 가는 길 중간쯤의 오른쪽으로 보이는 ‘이름 모를 자유용사의 비’
설악산 비선대 가는 길 중간쯤의 오른쪽으로 보이는 ‘이름 모를 자유용사의 비’ 정재용 기자

비 앞에는 지난 현충일에 추념한 것으로 보이는 조화 바구니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바구니를 잠시 옆으로 옮기고 시인이자 건립 당시 제38사단장 장호강(張虎崗) 장군이 지었다는 비문을 읽었다.

“지금은 자유의 땅 여기 임들이 고이 쉬는 설악에 영광의 탑은 높이 섰나니 아아 붉은 원수들이 성남 파도처럼 밀려오던 날 조국의 이름으로 최후까지 싸우다가 꽃잎처럼 흩어진 수많은 영들 호국의 신이여, 임들의 이름도 계급도 군번도 누구하나 아는 이 없어도 그 불멸의 충혼은 겨레의 가슴깊이 새겨져 길이 빛나리라. 천추에 부를 임들의 만세여 언제나 푸른 동해물처럼 영영 무궁할 지어다. 1965년 10월 30일”

소공원의 남쪽으로 설악산지구 전적비가 눈에 들어왔다. 동상(銅像)이었다. 소대장으로 보이는 국군이 왼손에 착검한 소총을 들고 오른손을 높이 들어 “돌격 앞으로!” 구호를 외치고 있는 듯 했다. “너는 지금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호령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설악산전투는 중공군 1차 춘계공세 당시 1951년 2월 삼척부근에서 태백산맥을 따라 북진한 국군 제1군단 예하 제11사단과 수도사단이 5월 7일부터 6월 9일까지 공격을 계속하여 양양과 간성을 탈환하고, 향로봉지역의 북한군 5군단을 격퇴하여 설악산 일대를 확보하였다. 그 후 중공군의 제2차 춘계공세로 강릉과 대관령지역으로 작전 후퇴하여 중공군의 침입을 저지함으로써 영동지역을 사수한 전투”였다.

설악산, 소공원 남쪽에 세워져 있는 설악산지구 전전비 동상. 정재용 기자
설악산 소공원 남쪽에 세워져 있는 설악산지구 전전비 동상. 정재용 기자

동상으로 다가가는 길은 화강암으로 포장돼 있었고 동상 주위는 안내 동판과 전투장면을 그린 부조(浮彫)물로 장식이 둘러싸고 있었다. 설악산은 6.25전쟁 이전에는 38선 이북이었다. 이름 모를 자유용사의 비도 이처럼 꾸미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을 모르면 소홀히 여기기 쉽다. 국립묘지에 안장된 이는 이름이라도 있지만 이름 모를 자유용사는 육체를 산화(散華)시켜 무덤조차 없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싸우다가 하늘의 별이 됐다. 정부는 내년에 604조 4천억 원의 수퍼 예산을 편성하기로 했다고 한다. 세금은 이런데 쓰라고 낸 것이다.

추석이 보름여 앞으로 다가왔다. 산소를 찾아 벌초를 하고 아파트 뜰과 공원, 강변 둔치에도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이름 모를’ 용사의 비 주위도 말끔히 풀이 깎여있기를 소원한다. 적어도 화강암으로 말끔하게 포장될 때까지는 계속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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