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나의 그때 그 시절] 이종환 경북대 명예교수 ③대한민국 선진국 진입
[남기고 싶은 나의 그때 그 시절] 이종환 경북대 명예교수 ③대한민국 선진국 진입
  • 시니어每日
  • 승인 2021.08.31 10:41
  • 댓글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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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환 교수는 1953년 출생
경북대학교 인문대학 일어일문학과 명예교수
대구사회문화대학 부학장
6.25 당시 부산 피란촌

 

2021년 7월 2일! 코로나 팬데믹 와중에도 우리 대한민국에 큰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스위스 제네바 본부에서 열린 유엔무역 개발회의(UNCTAD) 제68차 무역 개발 이사회 마지막 날 회의에서, 대한민국이 만장일치로 선진국의 한 나라가 되었다는 朗報(낭보)가 전해졌다.한마디로 대한민국의 국격이 상승한 것이다.

UN 산하의 유엔무역개발회의가 설립된 1964년 이후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지위가 상승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처음이다.

50여 년 전 중학교 2학년 시절. 담임 선생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10위권에 드는 부자나라가 되었다. 긴 긴 세월 동안, 잘살아 보겠다는 우리 국민의 끈기와 집념에서 비롯한 것이다.

학창 시절부터 해마다 식목일이면 근교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심었다. 내가 어릴 적에는 벌거벗은 민둥산이 많았다. 산 나무를 베어서 아궁이 땔감으로 썼든 게 주요인이었다.

국가의 산림녹화 정책에 힘입어 민둥산은 점차 푸른 옷으로 새 단장을 해갔다. 김동진 전 청도 부군수님(대구사회문화대학 이사)의 말씀에 의하면, 산림 강국을 달성하기 위해 1967년 1월 1일 산림청으로 독립했다. 그리고 그 뒤 1973년 3월 3일 내무부 소관으로 이관했다.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이 1973년부터 시행되었다. 당시에 심은 나무 한 포기마다 명찰이 달려있었다. 나무 이름, 관리 공무원, 번호, 토양 성분 등이 적혀있었다. 1960년대 국민소득이 겨우 100$인 나라에서 21세기에서나 볼 수 있는 5G 세상을 설계하고 있었다.

헐벗고 배고픈 시절! 쌀 한 톨 보리 한 톨이 아쉬운 시절에도 우리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벌거벗은 산과 들에 나무 심기를 했다.100년 후, 천년 후,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줄 아름다운 국토를 설계한 것이다.

나는 어릴 적에 우리 할아버지 세대에 은근히 불만을 가졌다. 얼마나 못났으면 자기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을까 하고.

요즘 차로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제법 뿌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 전국 방방곡곡 깔린 아스팔트 도로. 신작로에 소구루마가 어슬렁거리며 다니던 일이 불과 50여 년 전인데... 세상이 바뀌어도 한참 바뀌었다. 차창 넘어 보이는 녹색 수림을 보고 있자면 속이 탁 트인다.

2005년경, 동료 교수들과 함께 개성 공단을 방문한 적이 있다. 서울 경복궁에서 경기도 파주시 도라산역까지 단체 버스로 50분 남짓한 거리였다. 남북이 본래 한나라인데. 입출국 절차를 밟는 게 의아스러웠다. 북녘땅을 밟는 게 처음이었다. 그 감동으로 가슴이 뭉클했다.

DMZ를 지나서 개성 공단 입구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 일행은 너무 생소한 풍경에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개성의 산에는 나무가 전혀 없었다. 황토색 바닥이 보일 만큼 벌건 산이다. 애당초 계획에는 개성 시내의 선죽교 견학을 포함하고 있었다. 바로 그 전 날 비가 와서 개성시가 수해를 입었다. 개성은 비가 조금만 와도 市街(시가)가 잠긴다고 한다. 그 원인은 산과 들에 나무가 없기 때문이다. 개성시를 못 본 게 쓸쓸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의 명언은 196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 큰 거울이 되었다.

2017년 여름, 정년을 앞두고 인문대 교수들과 함께 동북 3성, 길림성 연변 흑룡강성을 탐방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멀리 북녘땅을 보았다. 여전히 그 산에는 나무가 없었다. 민둥산이었다. 가슴이 아팠다.

오래전 일본 유학 시절에 만난 재일동포 노인의 말씀이 새롭다. "우리나라는 삼천리 금수강산이다. 그 땅에 무얼 심어도 열매가 잘 열린다. 먹을 양식이 없어 사람이 떼죽음을 당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북쪽은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구약 성경 「출애굽기」의 주인공 모세는 노예 생활에 억눌린 유대인 동포를 구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으로 간다. 그 긴 행렬 뒤에는 이집트 군사들이 창과 칼을 번뜩거리면서 쫓아오고 있다.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통해 그들은 무사히 약속한 땅으로 갈 수 있었다.

1971년에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었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

세상에서 제일 못사는 나라 대한민국!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을 비교해보면, 북한은 240$, 남한은 80$이었다. 북한이 남한보다 3배나 높았다.)

그들의 소망은 하루 밥 세 끼를 굶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아주 소박한 꿈에서 출발했다. 새마을 정신은 우리 민족에게 물질적 정신적인 혁명을 몰고 왔다. 정말 겨자씨만큼 그 가능성이 작았지만, 끊임없는 우리의 노력으로 그 꿈을 이루게 되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 마을을 가꾸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가난을 떨쳐버리고 「일어나」(You raise me up)는 용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가며, 나라 사랑을 歐歌(구가)하는 정신이 곧 새마을 운동이다.

손재근 경북대 명예교수에 의하면. 우리나라가 식량 자급자족이 이루어진 첫해가 1977년이다. 그 기준은 국민 1인당 연간 식량이 쌀 한 섬(144kg)이다. 1971년부터 통일벼라는 신품종을 도입하여 식량 증산에 전념한 게 성공 요인이 되었다. 같은 면적에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여 생산량을 늘리는 농업정책은 오늘날 스마트 팜(smart farm)의 원조가 된다. 1977년은 바로 배고픈 시절의 상징인 보릿고개를 넘어서는 해이다. 따라서 1977년은 산업화로 가는 원년이 된다. 반만년 역사상 처음으로 식량 자급자족이 이루어진 해이다. 삼천리 금수강산도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기쁨의 눈물을 머금었다.

새마을 운동은, 한마디로 기적을 창출한 위대한 우리 민족의 「復活 (부활)」이다. 진정한 부활이란 정신운동에서 비롯한다. 긴 긴 세월 가난을 숙명처럼 여기고 있던 우리 민족의 패배 의식을 떨쳐내어 무한한 가능성을 불러준 게 바로 새마을 운동이다. 21세기의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가 어울려져 이루어 낸 한 송이 국화꽃이다.

내 나이도 70을 눈앞에 두고 있다. 후배들에게 한마디 드리고 싶은 것은, 이제 서로 화합하는 세상을 만들어 가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 내가 달리고 있는 고속도로에는 우리 모든 국민이 달린다.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산림 또한 우리 모든 국민이 즐겁게 감상한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갤럭시 스마트폰은 우리 모든 국민이 愛用(애용)하고 있다.고속도로와 산림 그리고 스마트폰에는 좌우의 인식표가 붙어 있지 않다. 우리 모두만 있을 뿐이다. 오늘날 한국 政界(정계)는 좌우 또는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져 서로를 삿대질하고 있다.

그 상대방이 누구인가? 바로 우리 부모 형제이며 친구가 아닌가. 하늘을 쳐다보며 자기 얼굴에 침 뱉는 행위이다. 앞으로 정계는 서로 편 가르지 말고 화합하는 분위를 창출해 주길 바란다. 이제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나라를 물려 줄 수 있다는 自讚(자찬)에 사로잡힌다. 창밖에는 보슬비가 소리 없이 보슬보슬 내린다. <끝>

이종환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