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22)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22)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1.07.2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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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손길로 바구미처럼 밀가루반죽을 파먹고 있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은 여전히 한여름 밤이나 마찬가지로 짧다
걸귀가 들었는지 먹는 냄새는 귀신같이 맡아 찾아드는 객꾼들이 있다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첨성대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첨성대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모난 돌멩이처럼 밉상스럽게 생겨도 상관없다. 예쁠 필요도 크기가 고르지 않아도 된다. 엄벙덤벙 밀가루반죽을 손으로 뚝뚝 떼어서 솥에다 던져 넣으면 된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수제비를 뜨는 손길이 들쑥날쑥 한다. 베틀의 씨줄과 날줄 사이를 분주히 오가는 북처럼 철커덕철커덕 바쁘게 움직인다. 주위로는 빗물을 받치는 아낙네들이 빙 둘러서 헌 비닐을 펼치고, 구멍 난 비닐우산을 받쳐서 시녀처럼 둘러섰다. 딴에는 꼼꼼하게 둘러 쳤다지만 고개를 쳐들자 구들장 같은 먹장구름이 보이고 빗방울이 성성이는 모양이 엉성하기 짝이 없다. 그 틈을 비집고 가마솥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국물에 간을 더한다며 깔깔거리는 웃음까지 덤으로 넣는다.

찬비가 내린다지만 가마솥을 감싸고도는 열기는 열천으로 기승을 부린다. 어느새 이마에는 수정구슬 같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다. 하지만 솥전에 찰싹 달라붙어 열기를 온몸으로 견디는 아낙네들은 한마디 불평도 없다. 곧장 입으로 들어갈 수제비만 생각하는지 바쁜 손길로 바구미처럼 밀가루반죽을 파먹고 있다. 손톱 밑으로 때가 새까만 손을 빗물에 첨벙첨벙 대충 씻은 뒤 때에 찌들어 꾀죄죄한 앞치마나 차마말기를 잡아당겨 대충 문지르곤 팔랑팔랑 나비가 날아다니듯 떼어 넣는다.

누구는 손톱 밑으로 때가 까맣게 내려앉는 손을 보고 더럽고 추접하다 할지 모른다. 그런 손으로 식구가 먹고 이웃들이 먹을 신성한 음식을 할 마음을 냈냐고? 하지만 겉으로만 판단할 수가 없어 그 손은 그 어느 손보다 귀하고 아름다운 손이다. 손은 사람의 신체 중 얼굴 다음으로 노출이 많은 만큼 눈이 많이 가는 곳이다. 손을 통해서 그 사람이 살아온 과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 손바닥에 난해하게 그어진 손금에 따라 우주가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귀하고 아름다운 손일지라도 생활고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다. 먹고 살기에 바쁜 생활이 가만 두지를 않는 것이다. 농투성이 부인으로 또 농투성이로 살아온 세월에게서 받은 훈장처럼 일그러져버린 손이다. 두꺼비 등 같고 거북이 등가죽처럼 쩍쩍 갈라져 딱딱하고 투박한 손이지만 처녀 적에는 다들 섬섬옥수로 불린 적도 있었다.

그 아름답고 보드랍고 매끄럽던 손이 먹고산다는 생활고에 시달린 끝에 오늘에 이른다. 하지만 그 손이 한집안의 살림을 너끈하게 책임지고 있다. 처음 맞닥뜨린 시집살이에 물 대중을 제대로 못했던 손, 물을 많이 잡아 진밥, 덜 익혀서 설익은 밥, 물을 적게 잡아 고두밥을 지은 탓에 흘린 눈물도 무지한 잘못을 사하려는 듯 손이 닦아냈다. 얼음장을 들쳐 찌든 빨래에 지쳐 주린 뱃구레를 어루만져 달래던 것도 손이다.

겨울밤은 길다. 황진이는 ‘동짓달’이란 시조를 통해 긴 밤도 아닌 ‘긴긴밤’이라며 ‘긴’이란 단어를 더해서 강조했다. 녹의홍상에 얼굴에는 지분을 뽀얗게 발라 몸단장을 한껏 부린 그 마지막에 향수를 까지 살짝 뿌려 뭇 사내들과 어울린 초저녁을 지나 맞은 깊은 밤은 더 없이 길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여름철 유시(酉時)가 지나야 오던 저녁이 겨울철이면 유시와 함께 어둠이 찾아든다. 무려 한시진하고도 한시경이나 늘어난 시간이 흥행 뒤의 공허하고 허황함처럼 지겨웠던 모양이다. 그렇게 길어난 밤이건만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은 여전히 한여름 밤이나 마찬가지로 짧기만 하다. 구멍 난 양말을 깁고, 뚫어진 무릎에 헝겊을 덧대서 마름질을 하느라 잠시 손 쉴 틈 없다. 피곤에 지쳐 자불다(졸다.의 방언)가 귀밑머리가, 애교머리가, 눈썹이 가물거리는 호롱불에 그을어도 쉬 눈을 붙일 수가 없다. 기름이 타는 듯 소소한 냄새를 손을 내저어 지우고, 그슬린 머리끝은 ‘쓱쓱’문질려 흔적을 지우며 할아버지의 풀을 먹인 하얀 적삼을 펼쳐 숯불이 이글거리는 다리미와 발갛게 단 인두로 주름을 곱게 펴고, 먼데 사람들이 속도 모르고 듣기 좋다는 다듬이질로 오밤중을 반납이다. 게다가 식구 중 누군가가 출출하다고 응석이라도 부리면 이경이라도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꽁꽁 언 물을 녹였다.

그 고생이 막심한 세월을 어찌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불똥이 내려앉은 손은 뼈골까지 시린 물이 쓰다듬고, 가시가 할퀴고 간 자리로 피가 흘러 아픈 손은 거친 배적삼이 어루만졌다. 지심의 득세에 시달리고 시어머니의 구박에 잠시도 쉴 틈이 없는 것이 손이다. 모진 세월이 두께를 더하다보니 본래의 형태에서 손가락 마디마디는 굵어지고, 휘어지고 구부러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풍상의 세월 속에서도 손은 여전히 봉제사와 접빈객을 능히 치루고 시부모의 봉양을 내 몸보다 아껴 오롯이 떠받든다. 그 와중에도 대를 이을 자식을 낳아 알뜰살뜰 거두고 남편 섬기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손이다. 보기에는 탐탁찮을지 모르겠지만 따지고 보면 한 결 같이 위대한 손이다.

그 손이 없었다면 어떻게 집안을 온전하게 건사해 나갈 수 있었을까? 간사하고 게으른 눈이 지레짐작으로 포기를 한 일들을 끝까지 마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손이 있어서 가능하다. 그런 가운데 폭염아래 밭이랑을 헤매는 호밋자루에서 물집이 생겨나고, 소꼴을 베는 낫자루에서 굳은살이 내려앉고, 땟거리 준비로 분주한 부엌칼자루에서 못이 박힌 손이다.

삭정이처럼 투박한 손들이 가마솥 위에서 제각각의 모양으로 너풀너풀 춤을 춘다. 바람을 탄 팔랑개비처럼 팽그르르 돌아 날렵하게 움직인다. 뚝뚝 끊어진 밀가루 반죽들이 청산가는 나비처럼 나풀거리다간 체념한 표정으로 아래로, 아래로 내려앉는다.

나머지는 장작불이 익히고, 가마솥이 끓이고, 시간이 맛내기를 기다리는 일 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기다릴 것도 없다. 이내 펄펄 끓기 시작한다. 한소끔 끓어서 농익어 가는 것이다. 밀가루가 품고 있는 특유의 구수한 냄새와 풋고추의 풋풋함, 게다가 애호박과 감자가 익는 냄새를 더해 하모니를 이루자 G선상의 아리아가 귀전에 아름다운 것처럼 코끝을 달짝지근하게 감친다. 다들 군침을 삼키며 부엌에 있는 그릇이란 그릇은 예비군동원훈련이라도 떨어진 듯 죄다 동원한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제각각인 보시기도 모자라 크고 작은 바가지까지 동원하여 나누어 담은 수제비를 숟가락으로 떠서는 ‘호호’불어 입으로 가져가기가 무섭게 맛있다고 꿀맛이라며 먹는다. 그 표정들이 더 없이 환해 얼굴은 이슬을 듬뿍 품은 함수화이파리가 활짝 벌어지듯 핀다. 맛이야 두말하면 잔소리라고 둘이 먹다가 구경꾼까지 셋이 죽어도 모를 지경이란다.

김이 무럭무럭 올라 뜨겁다고 ‘후후’불어 먹는 수제비도 수제비이려니와 재차 옹기종기 모여앉아 못 다한 수다를 떠는데 시간이 한량없다. 그뿐만 아니라 늦가을을 맞아 겨울을 부르는 비가 추적이면 모여든 동네 아낙네들은 솥뚜껑을 홀라당 뒤집었다.

물에서만 살다 생을 마감하는 잉어가 고즈넉한 절간의 추녀에 깃든 풍경의 불알이 되어 제몫을 다하고, 살아생전 땅속에 뿌리를 박았던 나무뿌리가 하늘 향하는 순간 장승이 되어 다른 세상을 맞듯 솥뚜껑이 뒤집어지면서 또 다른 일에 제 몫을 다한다. 커다랗게 퍼져 싱싱하다 못해 시퍼렇게 갈기를 세운 배추를 소금에 살짝 절었다가 씻은 뒤 소금기가 간간한 밀가루 반죽에 목간(목욕)을 하고는 뒤집어진 솥뚜껑 안에서 배추부침개로 거듭난다. 들깨기름이 자글자글 끓어오르는 솥뚜껑에서 두서너 번 몸을 뒤집다간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노릇노릇하게 익어가는 것이다. 그럴 때면 걸귀가 들었는지 먹는 냄새는 귀신같이 맡아 찾아드는 객꾼들이 있다.

지나가던 어른과 아이들이 “배추 적이네”하며 하나 둘 불을 본 부나방처럼 찾아든 것이다. 때 아닌 불청객 중에는 알밤같이 또랑또랑한 아들도 있고 희멀겋게 웃으며 어정쩡하게 선 신랑도 힐끔힐끔 보인다. 불콰한 얼굴이 가을 홍시를 닮았다. 건들건들하는 모습이 밉상스러워 속으로 “어이구 화상 저~저 꼬락서니 하고는!”하고 분을 끓이지만 그래도 내 서방인데 어쩔 것인가? 결코 내칠 수 없는 귀엽고 예쁜 객꾼들이다. 속으로는 은근하게 잘 찾아왔다고 반긴다고 하는 말이 “어째 알고...!”하며 내던지는 말이 퉁명스럽기 짝이 없다. 무안한 듯 “아~따! 속으로는 쾌재를 불러 좋으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왜 하고 그래!”하며 옆에선 아낙이 주위를 환기시켜 “00아부지 어서 오세요! 00아 이리 이리로!”하면 손짓으로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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