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으로 둘러쌓인 경주 동궁과 월지
연꽃으로 둘러쌓인 경주 동궁과 월지
  • 장희자 기자
  • 승인 2021.07.22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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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이 신라 천 년을 회상시키며
위로와 평안을 주는 곳
연꽃 뒤편에 부용화가 서 있었다. 장희자 기자

초록 속살 빈 가슴에
떨어지는 이슬비   
수정으로 토해내는
깨끗한 연잎 하나   
세월의 틈바구니에
삶의 몸을 닦는다   
진흙 깊은 연못
물안개 떠난 자리              
햇살 퍼질 때               
수면 위에 꽃불 밝히고
두 손 모아 합장한다. 

(연꽃,   노태웅)

 

동궁과 월지는 경북 경주시 인왕동 517번지에 있다. 연꽃단지는 동궁과 월지 역사유적 좌우 양쪽에 있다. 좌측 연못은 주차장에 맞닿아 있다. 우측 연못은 4만8로 규모가 큰 연못이다.

동궁(東宮)과 월지(月池)는 신라 왕궁의 별궁 터이다.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었다.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은 백제 견훤의 침입을 받자 931년 왕건을 이곳에 초청하였다. 잔치를 베풀면서 신라의 위급함을 호소하며 구원을 요청하였다. 

흰 연꽃 뒤편으로 선덕여고 교정 정원수가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장희자 기자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월지)을 팠다. 못 가운데에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산을 만들었다.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었다.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679년에 같은 위치에 별궁(동궁)을 짓고 임해전(臨海殿)과 여러 건물의 이름을 새로 지었다. 고려 및 조선 시대에 이르러 이곳이 폐허가 되었다. 시인 묵객들이 연못을 보며 '화려했던 궁궐은 간데없고 기러기와 오리만 날아든다'는 쓸쓸한 시 구절을 읊조리며 안압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이 있고 안압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서안압지의 서쪽에는 임해전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동궁과 별지로 조성된 자리를 안압지로 추정하고 있다.

홍련과 백련이 어우러진다. 장희자 기자

1980년 유적지 발굴에서 임해전 터의 못 주변에는 회랑지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많은 유물도 출토되었다. 그 중 보상화무늬가 새겨진 벽돌에는 조로 2년(調露 二年, 680)’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임해전이 문무왕 때 만들어진 것임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안압지는 신라 원지(苑池)를 대표하는 유적이다1980년에 안압지에서 발굴된 토기 파편 등으로 신라시대에 이 호수를 월지(月池)라고 불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명칭은 반월성(半月城)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해전의 이름도 원래는 월지궁이다.

월지 북동쪽으로 동해남부선 열차가 지나간다. 장희자 기자

2011년 7월부터 오랫동안 써 왔던 안압지 대신 동궁과 월지로 변경되었다.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복원했다. 서쪽 못가의 신라 건물터와 안압지도 복원하였다.

일제시대에는 철길을 만들어 고의적으로 우리 민족의 혼이 서려 있는 동궁과 월지를 통과시켜서 맥을 끊으려 했다. 2005년부터 연꽃단지를 조성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약 5만여㎡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연꽃 전국명소 10곳 중 하나로 선정 되었다.

삼각지에서 연꽃. 장희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