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 석종출 기자
  • 승인 2021.07.1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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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책임의 한계를 분명하게 하고
정부가 해 줄수 있는 한계를 인식해야.

“자유주의에 의해 성립된 근대 정치 이론 및 실천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별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처음에는 공적 영역에만 헌법의 기본권 보호 원칙이 개입할 수 있었고 사적 영역은 계약자유의 원칙이 지배해 국가가 기본권 보호 문제를 들며 개입할 수 없었다. 노동 현장에서의 불공정성이나 가정에서 아내와 자녀들에게 휘두르는 가장의 폭력성 등은 모두 자유가 지배하는 사적 영역의 일로 취급되어 오랫동안 문제로 인식되지 않았다. 사적 영역도 시민사회와 가정의 영역으로 나누어졌는데 같은 자유의 영역이라 할지라도 시민사회의 영역을 지배하는 것은 자유방임주의였고 가정의 영역을 지배하는 것은 프라이버시였다”(판결과 정의 김영란 109쪽)

유아와 어린이에 대한 학대 내지 가정의 폭력행위는 사적인 영역이고 프라이버시의 문제로 다루어 졌던것이 사실이다. 근래 SNS 확산으로 모든 사람과 이웃이 되고 내밀한 사적인 부분도 자칫 노출이 되는 상황이다. 예전에는 훈육이나 군기라는 이름하에 매질은 여사였다. 학교에서도 군대에서도 소위 빳다(몽둥이로 가격하는 체벌의 일종)라는 체벌은 벌도 아니었다. 당연히 그런 것으로 알았고, 행해졌고, 반발은 없었다. 민주화 물결이 많은 것을 바꾸어가고 있다. 개인의 사생활이 이처럼 완벽하게 보호받고 있는 것도, 대통령을 빨갱이라 하고 국민을 개 돼지라고 까발라도 처벌받지 않는 말의 자유를 누리는 것도 바뀐 세상의 현실이다. 상전벽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바뀌었다.

노동 현장에서의 불공정과 부당한 처우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과할 정도로 예민하게 확산되어 가고 있다. 급진적 성장과 외형 확장의 시절에 현장에서의 사망사고는 단순한 재해에 불과하였다. 어느 청년의 죽음이 큰 물결이 되어 현장의 안전에 대한 변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게 된 현실도 그 청년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죽음의 불공정이라고나 할까. 죽음이 안고 있는 시대의 요구가 죽음의 불공정을 공정으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동산 가격의 폭등은 집에 대한 실수요자의 꿈을 삼켜버렸다. 생애 최초로 내 집을 마련하는 젊은 청춘들은 영끌 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냈다. 주택에 대한 개념을 살아가는 공간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외쳐도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 뿐이다. 집값 상승은 개똥벌레가 소똥 굴리듯 불어 가는 것이니 어느 누가 관심 밖으로 치부하겠는가? 집이 보금자리가 되려면 그 집이 영혼을 갉아먹는 괴물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적영역의 자유계약이 난무하는 바람에 다시 통제를 받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지만 삶의 기본권이라 어쩔 수가 없는 위정자의 애물단지가 되어 버렸다.

자유방임은 국가가 개인에게 최소한의 개입으로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다. 계약의 자유나 자기책임의 원칙이 실제로는 거대한 구조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의 선택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그 책임에서 국가는 자유로울 것인가? 생각이 복잡해진다. 가정폭력, 노동현장의 공정과 불공정, 부동산(집값)의 가파른 상승에 대한 개인의 자기책임에 대해 넓게 깊게 생각해 볼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