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20)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20)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1.07.12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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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로 난 생명이, 절로 난 잡초가 절로 자라나는 계절이 봄이다
해와 달이 역할을 바꾸듯 무엇이든지 들어 줄게!
쓰기에 따라 독약이 사람을 구할 수도, 산삼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2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2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삭풍이 메마른 나뭇가지사이를 할퀴고 대지를 에는 겨울밤이면 간혹 마당에서 사람소리가 났다. 그럴 때면 “거 누구요”하고 방문을 열고 싶은 마음을 할머니는 꾹꾹 눌러 참는 것이었다. 그들은 필시 초가의 추녀 끝을 뒤져서 참새를 잡는 동네 청년들, 그도 아니면 무서리, 무짠지나 배추짠지 서리를 나선 동네 꼬마들이란 걸 할머니는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는 척 방문을 열었다간 마녀라도 본 듯 놀라 꽁지 빠져라 도망가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양껏 가지고 가라고 모르는 척 내버려 두는 것이다. 내 집같이 여겨 마음 놓고 가지고 가라는 것이다. 그럴 줄 알고 지난 가을 넉넉하게 준비했다는 말이 입안서 뱅뱅 맴도는 것을 애써 참는다. 비록 하고 싶은 말을 삼켰지만 할머니는 그들의 발자국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콩닥거린다. 내 집에도 사람이 찾아 왔다고? 장마철 소나기 끝에 하늘로부터 마당 한가운데로 떨어지는 붕어와 미꾸라지를 보는 것처럼 신기하다 여기는 것이다.

그 외에도 여름철이면 짝을 찾는 매미가 대추나무에 찰싹 달라붙어 목이 쉬도록 자지러지게 울었고, 가을철에는 몸 전체에 불이라도 붙은 듯 빨간 고추잠자리들이 떼로 몰려와 하늘을 어지럽게 군무를 펼쳤다. 또 겨울철이면 집 앞 높다란 대추나무 우듬지에서 위태하게 올라앉은 까치가 반가운 소식 있다는 듯 ‘깍~깍’하고 울었다. 돌아오는 봄철이면 박새, 오목눈이들이 오종종 병아리를 거느린 암탉의 등을 넘어 바자의 성근 틈을 넘나들며 아지랑이를 희롱했다.

그러던 어느 따뜻한 봄날을 맞아 들판에 내동댕이쳐지듯 주저앉은 할머니는 세상이 죄다 원망스러웠다. 북서풍이 계절에 밀려 동남풍이라서 미웠고, 계절이 봄이라서 더 원망스러웠다. 할머니는 당시 계절 중 봄이 제일 싫다고 했다. 동남풍이 살랑살랑 이는 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계절이다. 절로 난 생명이, 절로 난 잡초가 절로 자라나는 계절이 봄이다. 인귀상반이라 집안에서 송장처럼 누워만 지내는 딸을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이런 봄은 왜 만들었냐면 상제님께 따따부따 따지고 싶은 심정이다.

늘 누워서만 지내는 딸, 왜? 내 딸만 주구장창 누워만 지낼까? 할 수만 있다면 새싹이란 새싹의 목을 시퍼렇게 날이 선 낫으로 죄다 베어버리고 싶다. 들판이란 들판으로 불을 놓아 몽땅 태워버리고 싶다. 땅을 뚫고 머리를 쏙쏙 내미는 쑥을, 달래를, 냉이를 있는 대로 캐서는 가마솥에다 넣어 물이 되도록 푹푹 삶아버리고 싶은 것이다. 마음만 그럴 뿐 호미자루를 내던지고 하늘 가장자리로 흐르는 흰 구름을 넋을 놓아 볼 적에 우연이 옆을 같이한 아낙이 “아~ 나물 안할 거여”할 때면 “아~ 해야지~ 캐야지, 예주록(몽땅) 캐야지, 메간지(목)를 댕강댕강 잘라 버려야지”중얼거린다. 무슨 말인가 싶은 아낙이 뜨악해서 한 마디 하는데

“시방 뭐라는 거요? 나물 안할 거냐고”하자 그제야 제정신이 돌아온 듯 호미를, 짝지–칼(잭나이프의 방언)을 찾는 할머니다. 이래저래 동네사람들의 눈 밖에 난 할머니다. 끝이 보이지 않은 긴 터널 같은 세월이다.

눅진하고 컴컴한 세월, 바깥세상과 할머니 사이로 어둠이 검은 장막처럼 처져 길어만 가는 세월이다. 그 암울한 세월 속에 할머니의 집에는 하나 둘 약봉지가 늘고 무언가 끄적거린 메모장만 한 장, 두 장 먼지처럼 쌓여갈 뿐이었다. 그런 가운데 할머니가 천덕꾸러기로 그나마 드나드는 곳은 결국 무당 집과 의원뿐이었다. 그때 할머니는 식모살이를 자처하여 허드렛일을 도맡다시피 했다. 그렇게 찾은 무당과 의원 집에서 할머니는 사람들의 온기를 느끼며 수다를 떨다가 신수점이나 약재에 대한 효능을 귀동냥으로, 등 너머로, 어깨 너머로 구박덩어리로 전락 익혀 오는 것이 삶의 전부였다.

그때 할머니는 지구 상에 33,333가지의 식물이 존재하며 그에 따라 33,333가지의 병이 생겨나고 33,333가지의 약재와 치료방법이 있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고모의 병도 33,333가지의 병 중 그 하나로 아직까지 33,333가지의 병을 다스리는 약재와 치료 방법을 죄다 찾지 못해 겪는 아픔이라 생각하게 된 것이다. 꾸준히 연구하고 배워나간다면 종내에는 필시 알 수 있을 것이고 언젠가 어느 날에는 필시 찾게 될 것이라 부단히 노력에 경주를 기울이리라 다짐한다.

그 즈음 가끔 여동생이 누워있는 방에 든 아버지는 농사일로 굳은살이 못처럼 박혀 억센 손일망정 고모의 이마에 손을 얻어

“동생아! 사랑하는 내 동생 끝순아! 어서 기운 차리고 일어나야지! 이 오빠가 비록 가진 재주도, 아는 지식도 없지만 내 동생 끝순이가 원하는 것이라면 동화에서 처럼 해와 달이 역할을 바꾸듯 바꾸어 줄게! 간을 원하면 간을 주고, 콩팥을 원하면 콩팥을 주고! 나는 네가 진정 건강할 수만 있다면 뭐든 다 줄 수 있다. 설령 목숨을 달라하면 목숨을 주고,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라도 따다 달라하면 이 길로 괴나리봇짐에 곧장 길을 나설 것이다. 근께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마음에 두지 말고 언제든 말해다오”하며 인정을 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고모가 세상을 경험하지 못한 탓에 딱히 요구할 그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벽을 보고 읊어내는 공염불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고모도 몸이 아플 뿐, 인간이며 이성이 살아있고 감정은 또한 살아있었다. 정을 영 모르지는 않았다. 오라버니의 그 같은 말에 반응이라도 하듯 이불 귀를 가슴까지 내려 까무잡잡한 얼굴에 흰자위가 가득한 눈으로 아버지를 향해 방긋 웃는다. 더 없이 다정한 오누이의 한때다. 비록 내색은 않았지만 할머니도 그때 만큼은 믿음직한 아들이고 또 여동생에게는 다정한 오라비로 진정 한 가족이다 싶어 가슴 뭉클한 기분이었다.

그런 가운데 할머니는 약초에 대한 심한 유혹에 시달리고 있었다, 귀한 약초는 심산유곡에 많이 있다는 말에 강한 유혹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고 병든 딸을 오빠라고 아들에게 전적으로 맡기고는 금선탈각, 탈피한 매미가 푸른 창공을 훨훨 날아가듯 먼 길을 떠날 수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할머니의 약봉지 속의 약재는 집 근처에서 구한 약초들이 거의 전부였다. 남들이 저 먼 곳, 높은 산에 올라야지 적하수오 또는 동자삼, 천 년 산삼 하다못해 능이버섯이나 노루궁둥이버섯. 오래 묵은 당귀나 삽주, 천궁 등등의 귀한 약재를 구할 수 있다고 귀 뜸을 해 올 때면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하는 할머니다.

하지만 할머니도 수년을 거쳐 오며 배운 할머니만의 노하우가 있었다. 약초의 적절한 배합이 그것이었다. 청산가리, 부자(附子)가, 비소(砒素)가 늘 사람을 죽이는 약재가 아니고 산삼이 늘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약초가 아니듯 쓰기에 따라 독약이 사람을 구할 수도, 산삼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에 따라 할머니는 비록 흔한 약재지만 고모에게 적절하게, 체질에 맞게, 감당할 수 있게 처방을 하고 약을 달이는 것이었다. 그런 처방이 바른 처방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단지 몸에 해롭지 않게, 그것도 미미하게 하는 처방이다 보니 최소한 몸에 해롭지는 않다 여기는 것이다.

그렇다고 품고 있는 욕망이 완전하게 해소 되지는 않았다. 그런 까닭에 할머니는 늘 절해고도에 유배된 기분이었다. 사정을 잘 알아 살갑게 지내던 이웃마저 등을 돌려버리자 위리안치 되었다 여긴 것이다. 눈에는 보이지는 않은 탱자나무의 살벌한 가시가 담처럼 둘러쳤다 여기고 있었다.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고모의 치료를 위해 다소 무리한 점이 없잖아 있었지만 특별하게 해를 끼친 적도 없는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런 가운데 할머니의 머릿속으로 한 여인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 여인이 치맛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한 날이 언제부턴지는 정확한 기억은 없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동네 사람들은 그 여인의 말을 좇아 이구동성으로 할머니를 향해 노망이 났느니, 미쳤다느니, 3년 병수발에 효자 없다는 등 왈가왈부 떠들다가는 제풀에 겨워 등을 돌려 칼로 무를 자르듯 발걸음을 끊어버린 것이다. 돌이켜보면 지난 세월이 이제는 몸에 이력이 붙어 잊을 만도 했건만 이웃의 옛정은 날이 갈 수로 진향 향기를 품어 시시각각으로 할머니의 눈물과 동행을 원한다.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잊을만하면 가슴에서 우러나 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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