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51)안강형 소나무에 둘러싸인 흥덕왕릉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51)안강형 소나무에 둘러싸인 흥덕왕릉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1.07.09 17:0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옥산서원이나 양동마을 보다 친근했던 곳
울창한 안강형 소나무 숲은 장관
흥덕왕릉 남쪽에서 찍은 사진이다. 봉분의 사방에 돌사자가 있다. 봉분에서 가까운 양쪽에 문인석이 하나씩 그리고 먼 곳 양쪽에 무인석 하나씩 서 있다. 정재용 기자
흥덕왕릉 남쪽에서 찍은 사진. 봉분의 사방에 돌사자가 있고, 봉분에서 가까운 양쪽에 문인석이 하나씩, 먼 곳 양쪽에 무인석 하나씩 서 있다. 정재용 기자

소평마을에서 옥산서원과 양동마을은 그리 멀지 않았다. 옥산서원은 ‘국민학교’ 6학년 때 걸어서 소풍을 갔다. 양동마을까지는 3.7km로 걸어서 1시간 거리에 불과했다. 둘 다 2019년과 2010년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유명해졌지 이전에는 보통이었다.

소평마을 사람들로서도 옥산서원은 먼 데 있고 양동마을은 가깝지만 별로 갈 일도 없고 평범한 시골마을에 불과해서 관심 밖이었다. 그냥 ‘양동산에서 해가 뜨고 옥산서원이 있는 도덕산(708m)으로 해가 진다’는 정도일 뿐 ‘가볼만 한 곳’ 하면 오히려 흥덕왕릉(興德王陵)을 꼽았다.

소평마을에서 보면 흥덕왕릉은 북서쪽에 있고 양동마을은 남동쪽이어서 서로 반대 방향이었다. 거리는 비슷했다. 마을사람들에게 흥덕왕릉은 어릴 때부터 소풍을 가던 곳이라 친근해서 “왕릉”하면 흥덕왕릉이었다.

소평마을 아이들은 모두 ‘안강북부국민학교’에 다녔고 흥덕왕릉은 이 학교의 단골 소풍 장소였다. 5학년이나 6학년 때 옥산서원 한 번 가는 것 빼고는 거의 이 왕릉이었다. 한번은 가을소풍으로 피일서원에 갔다가 은행나무 열매의 구린내로 소풍을 망쳤다. 6학년 가을소풍은 울산비료공장, 현대조선소, 부산용두산공원 등지를 둘러보는 수학여행이었다.

흥덕왕릉으로 가기 위해서는 학교를 출발하여 ‘육통’(六通)마을 앞을 흐르는 농업용수로 둑을 따라 서쪽으로 2km 정도 걷다가 ‘존당’(尊堂)마을에서 어래산 쪽으로 걸으면 됐다. 지금은 능곡마을 안쪽에 있는 왕릉 남쪽 주차장에 주차하고 소나무 숲을 지나 올라가지만, 주차장이 필요 없던 그때는 마을과 상관없이 왕릉 동쪽으로 난 큰길로 걸어 들어갔다. 왕릉이 있어 마을 이름이 ‘능곡’((陵谷)이었다. 보따리장수들이 먼저 와서 전을 펴고 있었다.

왕릉을 둘러싼 숲의 동쪽으로 들어가면 커다란 귀부(龜趺)가 나타났다. 돌 거북의 머리는 깨져나가서 만들다가 중간에 그만 둔 것 같았다. 보자기를 풀고 도시락을 먹고 나면 전체가 모여서 이어달리기를 했다. 왕릉에서 남쪽으로 50m 정도 떨어져 있는 문인석까지 달려갔다 오는 것이었다. 소풍의 백미는 보물찾기였다. 아이들이 달리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선생님은 몰래 보물을 숨기고 달리기가 끝나면 뿔뿔이 흩어져서 소나무 나무껍질 갈라진 틈과 작은 돌멩이 밑을 뒤지고 솔방울을 발로 찼다. 이튿날 선생님은 보물을 못 찾은 아이들에게도 노트를 줬다.

왕릉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널찍한데다 소나무 그늘이 좋아서 계모임이나 화수회(花樹會) 장소로 인기였다.

1986년 10월 정응해 씨 가족이 흥덕왕릉을 찾아 문인석 곁에서 찍은 사진이다. 정재용 기자
1986년 10월 정응해 씨 가족이 흥덕왕릉을 찾아 문인석 곁에서 찍은 사진. 정재용 기자

흥덕왕릉은 어래산(571m)의 남쪽 기슭에 있다. 안강평야는 자옥산(570m), 도덕산, 어래산이 산맥을 이루어 북서쪽에 병풍을 치고, 남서쪽의 무릉산(459m) 그리고 북쪽 멀리 비학산(762m)이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이렇듯 장소는 좋으나 무슨 까닭으로 신라 왕릉 대부분이 경주 부근에 있는데 비해 흥덕왕릉은 수도(首都)에서 약 30km나 떨어진 안강의 북부까지 오게 됐는지 의문이다.

왕릉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안내 간판의 내용을 옮겨 적기로 한다. “신라 흥덕왕릉(新羅 興德王陵), 사적 제30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 42번지(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육통길 190-26), 이 능은 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 김수종/ 김경휘)를 모신 곳이다. 왕은 지금의 전남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두고 장보고(張保皐)를 대사로 삼아 해상권을 장악하였으며, 당나라에서 차(茶)를 들여와 재배하도록 하였다. 밑 둘레 65m, 직경 22.2m, 높이 6.4m 되는 이 능의 둘레에는 호석(護石)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새겼고 그 주위로 돌난간을 둘렀다. 네 모서리에는 돌사자(石獅子)가 있고, 앞쪽에는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을 세웠는데 무인석은 서역인(西域人) 모습을 하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왕력편(王曆編)에 ‘능은 안강 북쪽 비화양(比火壤)에 있는데 왕비 장화부인(章花夫人)과 함께 매장하였다.’고 하였다. 1977년에 국립경주박물관 사적관리사무소의 발굴조사 때 상당수의 비편(碑片)과 함께 ‘흥덕(興德)’이라 새긴 비의 조각이 나와 흥덕왕의 무덤임이 밝혀졌다. 무덤 앞 왼쪽에는 비석을 세웠는데 지금은 비석을 받쳤던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만 손상된 채 남아있다. 당시의 둘레돌과 십이지신상 양식의 변천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간판은 뒤에 ‘경주 흥덕왕릉’ 으로 타이틀이 바뀌고 ‘김유신 장군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追封)하였다’는 내용이 추가됐다.

산림청에서는 우리나라 산지별 소나무 수형을 동북형, 금강형, 중남부평지형, 위봉형, 안강형으로 나누고 있다. 흥덕왕릉에서 볼 수 있는 구불구불한 줄기의 소나무가 ‘안강형’이다. 흥덕왕릉은 사진작가들에게 인기가 많다. 그들은 추운 겨울날 일출 무렵 안강형 소나무 사이로 안개가 피어오르는 장면을 찍고자 밤을 샌다.

흥덕왕릉을 둘러싸고 있는 안강형 소나무. 울진 금강소나무 숲길을 체험하며 ‘안강형’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정재용 기자
흥덕왕릉을 둘러싸고 있는 안강형 소나무. 울진 금강소나무 숲길을 체험하면서 ‘안강형’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정재용 기자

흥덕왕릉은 무덤의 주인이 확실하게 밝혀진 능이다. 신라 56개 왕릉 중에서 이렇듯 밝혀진 곳은 선덕여왕릉, 무열왕릉, 문무왕릉, 성덕왕릉, 원성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 경순왕릉의 8기에 불과하다. 거기다 흥덕왕릉은 능의 양식이 가장 잘 보존된 곳으로 원성왕릉(괘릉)과 쌍벽을 이룬다.

흥덕왕릉은 안강읍 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승용차로 가면 10분이 채 안 걸린다. 기계방면의 황새마을을 향해 중간쯤 가다보면 왼편으로 돌기둥이 나타나고 곧게 뻗은 포장도로를 볼 수 있다. 흥덕왕릉 입구를 알리는 표지석이다. 그 길을 따라 어래산 쪽으로 계속 가면 왕릉이다.

돌기둥의 동쪽은 광활한 들판이다. 그 복판에 소평마을이 있었다. 안강동부정류소에서 버스를 타면 흥덕왕릉 입구에 내려 소달구지 다니는 길을 25분 정도 걸어야 했다. 온돈(제값) 내고 반 차 타는 기분이 들어도 어쩔 수 없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