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애석불좌상이 전하는 한국전쟁!
마애석불좌상이 전하는 한국전쟁!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1.06.23 17: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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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부두를 떠올리는 1.4후퇴의 아수라장이 된다
불온한 삐라를 휴대한다는 등의 객기는 금물
재판을 받더라도 사형 또는 무기(無期)가 주다
주지 스님이 마애석불좌상의 어깨에 난 탄흔 자국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이원선 기자
주지 스님이 마애석불좌상의 어깨에 난 탄흔 자국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이원선 기자

대구광역시 동구 신무동 235-6번지에 있는 신무동 마애석불좌상(대구광역시 유형문화제 제18호)을 찾아 나섰다. 네비게이션을 이용하고 이정표를 따라가자 어렵지 않은 길이었다. 불상은 한국불교조계종 팔공산 구룡사 앞 축대위에 있었다.

사찰을 들어가는 입구의 왼쪽 축대위에 거대한 화강암의 동남측면을 이용하여 실(室)모양으로 얕게 파서 그 속에 좌불상을 조각해 놓았다. 불상의 높이는 89cm이다. 대좌는 가운데 가로선을 두고 상하에 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무늬와 아래로 향한 연꽃무늬를 새기고 연꽃잎 속에 다시 꽃무늬를 가미하였다.

구룡사는 2층 건물로 1층에는 천수관음상을 모시고 2층에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는 적멸보궁이었다. 2층에서 주지(圓峰·法一 姜聖範)스님의 허락 하에 진신사리를 친견, 촬영을 마치고 나오려는데 “마애석불좌상에도 6.25사변(한국전쟁)의 잔흔이 남아있는데 보실랍니까?”며 의중을 묻는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당시는 ‘북한괴뢰군’이라 칭함)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기습적으로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국전쟁은 2021을 맞아 71년째로 접어들고 있다. 서양의 전쟁 대부분이 종교로 인한 전쟁이거나 영토전쟁인데 반해 한국전쟁은 이와는 달리 이념전쟁이자 색깔 전쟁으로 시작해서 영토전쟁으로 끝을 맺는다. 적화통일을 목표로 파죽지세의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연합군과 합세한 국군과 대치함으로써 교착상태로 접어든다. 이때 연합군의 수장으로 있던 맥아더 원수는 1950년 9월 15일을 기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다. 작전의 성공은 불리하던 전세를 단숨에 역전시킨다. 허리가 끊어진 북한군은 급하게 철수를 할 수밖에 없었고, 반격의 기회로 삼은 국군과 연합군이 물밀 듯이 밀어붙인 끝에 압록강을 코앞에 두고 ‘통일’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희망에 부푼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개입함으로써 중과부적, 국군과 연합군은 황급하게 철수를 결정한다. 이때 민간인들도 합세, 이른바 그 유명한 흥남 부두를 떠올리는 1·4후퇴의 아수라장이 된다. 이후 휴전(1953년 7월 27일)이 이루어지기까지 한국전쟁은 치열한 땅따먹기(영토전쟁) 전쟁으로 접어든다. 말 그대로 각개전투와 육박전, 155m의 곡사포를 이용한 지원사격, B29기를 통한 융단폭격 등으로 이루어진 고지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런 고지전 등으로 인해 수많은 인명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는다. 그 결과 당초 38선을 두고 남북이 대치하던 것이 155마일 휴전선을 가운데로 대치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휴전 이후에도 미처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 잔당(빨갱이 또는 붉갱이)들로 인해 그 피해는 막심했다. 얼마가지 않아 이들은 토벌군에 의해 전멸된다. 하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휴전상태는 쌍방(남북한)의 피를 말리고 있다. 일종의 심리전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남은 분단국가가 안고 있는 비극이다. 여전히 색깔, 이념전쟁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무섭다던 지서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던 것도 휴전상태에서 암암리 벌어지고 있었던 심리전 때문이었다. 심리전의 하나로 북한에서 날아온 삐라로 인해 가능했다. 어떻게 날아왔는지 찔레나무 밑이나 강변의 돌 자갈 사이로 삐라가 떨어져 있었다. 내용은 거의가 대동소이했다. 남한은 보릿고개 등으로 굶주리는 데 반해 북한은 이밥에 고깃국으로 배부르게 잘 먹고 잘산다. 또는 장가 못 간 청년들을 노려 장가를 보내준다는 식의 예쁜 여자 그림이 있는 것이 대다수다. 가끔은 발가벗은 여자가 요염한 자세로 앉아있기도 했다. 호기심에 호주머니에 넣을라 치면 “순사가 잡아 간 데이~”하는 친구들의 한마디에 자라목처럼 집어넣었던 모가지를 빼듯 호주머니 속 삐라를 들고는 곧 바로 지서로 향한다. 일이 잘못 되기라도 하면 본인은 물론 가족과 친지들에게까지 그 화가 미치는 까닭에 불온한 삐라를 휴대한다는 등의 객기는 금물이다.

어른들도 무섭다며 진저리치는 지서, 그리고 순경들, 당시 순사들의 기세는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기세등등했다. 따라서 학연, 지연, 혈연을 따져서 순사 한 명만 잘 알고 있으면 크고 작은 송사에서 합의는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였다. 보이지 않은 힘이 얼마나 막강했던지 때로는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하는 것도 심심찮게 일어났으니 말해 무얼 할까? 그런 순사에게 ‘자유의 벗’이란 책을 받고, 연필을 받고, 장하다고 머리를 ‘쓰담쓰담’하게 한 것도 삐라 때문이다.

이에 못지않게 당시의 간첩 식별 방법은 지금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아 여운처럼 남아있다. 이는 그 위력이나 파급효과가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어쩌다 간첩이라도 신고하면 현재의 로또복권 당첨과 맞먹는 부(富)가 따랐고, 위로부터 내려오는 표창장은 가문의 영광이기도 했다. 당시 간첩이라면 천하에 다시 없는 괴물로 머리에는 소처럼 뿔이 달렸고 얼굴이 빨간 것이 잡는 족족 죽여야 한다는 것에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었다. 따라서 학교에서는 수시로 반공방첩에 관한 교육했고 심지어는 365자의 국민교육헌장처럼 외우라며 닦달을 서슴지 않았다. 당시의 ‘간첩 식별 방법’은 아래와 같다.

“새벽에 등산복 차림으로 출현/ 은연중 “동무”란 호칭 사용자/ 6.25때 행방불명되었다 최근에 나타난 자/ 갑자기 생활수준이 높아진 자/ 담배 값 등 남한 실정에 어두운 자/ 심야에 이북방송을 청취하는 자/ 군부대 주위를 배회하는 자/ 현 정부에 불만이 많은 자/ 직업 없이 사치생활을 영위하는 자/ 군부대 상황을 알려고 하는 자/ 장기간 행불되었다 나타난 자/ 연고자 없이 외국여행이 잦은 자”

구룡사 2층, 적멸보궁에 봉안 된 부처님 진신사리. 이원선 기자
구룡사 2층, 적멸보궁에 봉안 된 부처님 진신사리. 이원선 기자

열거한 식별방법으로 인해 더러는 팔자에도 없는 횡액을 당하는 피해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가을철 버섯을 따는 사람들이 주로 당했으며 송이버섯을 지키기 위해 새벽에 산을 다니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간혹 악용되기도 했으니 마음속에 미운털이 박힌 사람을 ‘욕 좀 봐라’신고해버리는 것이다. 그 어떤 죄보다 엄하게 적용한 죄가 간첩 또는 공비에게 가해지는 죄다. 이적행위로 인정사정이 없었다. 간첩으로 판명이 되면 처참함을 넘어 신문 과정에서 죽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재판을 받더라도 사형 또는 무기(無期)가 주다. 대부분 무혐의로 풀려나지만 공매에 치도곤이 덤으로 뒤를 따랐다. 그렇다고 신고자를 벌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마애석불좌상을 향해 주지스님이 앞장을 선다. 아닌 게 아니라 무심코 볼 때는 단순한 흠집이라 생각한 것이 설명을 듣고 보니 탄흔 자국으로 또렷하다. 손가락으로 탄흔 자국을 가리키는 주지스님은 아마 낙동강 전투가 치열할 당시 우연찮게 날아든 총탄으로 인해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사용된 정확한 화기가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탄흔의 자국으로 보아 카빈소총 종류는 아니라는 것이다. 탄흔 자국은 두 곳으로 마애불의 어깨와 맞은편으로 광배를 벗어난 지점에서 선명했다.

3여 년간의 질기고 긴 전쟁이 남긴 상흔이다. 언제쯤이나 말끔히 지워져 기록으로만 존재할지는 미지수다. 헤아릴 수 없는 사상자들의 유해 발굴도 현재로서는 요원해 보인다. 전투가 치열했던 칠곡 동명의 다부동 일대와 인근의 유학산에는 아직도 정확한 숫자조차 파악되지 않은 유해들이 하시라고 손을 써 달라며 발굴을 기다리고 있다. 북한지역은 차제하고 수시로 주인이 바뀌던 고지전이 치열했던 휴전선 155마일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비극은 자주국방의 의무를 도외시한 때문이다. 핵무기로 장착한 북한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함무라비 법전에 기록된 ‘눈 이에는 눈, 이에는 이’처럼 같은 핵무기가 요구되지만, 국제정세로 인해 불가능하다면 최첨단 장비를 동원 철저하게 무장해야 한다. 마애불이라서가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전쟁의 상흔들이 이를 일깨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