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㊿한여름 낮의 삽화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㊿한여름 낮의 삽화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1.06.21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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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긴 폭염의 하루
무더위에 논매기하다 더위 먹기도

여름이 되면 해는 양동산 개미콧등 쪽에서 떠서 도덕산으로 넘어갔다. 해가 북동쪽에서 돋아 남중(南中, 천체가 자오선의 남쪽을 통과하는 일)하고 북서쪽으로 지는 이 코스는 해가 지나는 가장 먼 길로, 해는 새벽같이 길을 나서야 그나마 저녁종이 울릴 때 쯤 서산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여름의 하루는 길고 길었다.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7월 24일 경이면 학교는 여름방학에 들어갔다.

농촌의 일과는 해가 뜨고 지는 데 맞춰 있었다. 따로 시계가 필요 없었다.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찬 이슬 맺힐 때에 일찍 일어나/ 해 돋는 아침부터 힘써서 일하라/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찬송가 그대로였다.

해는 아침부터 이글거렸다. 농부는 한 여름 짧은 밤에 모기장에 모기가 들어 자다 말고 한 바탕 소동을 벌인 터라 연거푸 하품을 해 댔다. 06시 44분 경주로 가는 첫 열차가 양자동역 철교를 건너면서 기적을 울렸다. 안개에 가려 열차는 잘 보이지 않았다. 이런 날을 두고 사람들은 ‘중 머리 벗어지는 날’이라고 했다. 안개 없는 날보다 옅은 안개 낀 날이 불볕더위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양동산의 왼쪽으로 보이는 작은 산이 개미콧등이다. 그 사이로 들어가면 안계저수지가 나온다. 여름이면 해는 개미콧등 가까이 양동산에서 떴다. 벼는 무더위야 잘 자라고 포기를 벌렸다. 정재용 기자
양동산의 왼쪽으로 보이는 작은 산이 개미콧등이다. 그 사이로 들어가면 안계저수지가 나온다. 여름이면 해는 개미콧등 가까이 양동산에서 떴다. 벼는 무더위야 잘 자라고 포기를 벌렸다. 정재용 기자

번개시장이 새벽장사 하고 셔터를 내리듯 나팔꽃과 호박꽃은 햇살이 강해지자 바로 꽃잎을 오므렸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면 ‘일찍 일어나는 벌이 꿀을 딴다’ 였다. 늦잠을 잔 벌이 아침을 먹으러 왔다가 그냥 돌아갔다. 달리아, 맨드라미, 분꽃, 채송화는 시들한 눈치였다.

며칠째 소가 눈에 눈곱이 끼고 소죽을 줘도 깨죽깨죽하는 것을 보니 더위를 먹은 게 틀림없었다. 일사병(日射病)이다. 농부는 보리 당가리(등겨) 한 잘바가지(자루 달린 나무바가지)를 퍼서 소죽에 붓고 나무갈퀴로 버무렸다. 보통 때 같으면 북적북적 소리를 내며 잘도 먹을 텐데 “묵어(먹어), 묵어” 애타게 부르짖어도 소귀에 경 읽기였다. 송아지가 짜증스럽게 젖을 추슬렀다. 농부는 내일 새벽에는 반드시 이슬 털로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소가 더위를 먹으면 벼 잎에 묻은 이슬을 받아 됫병으로 먹였다. 한 손으로 소의 코뚜레를 잡아 머리를 쳐들게 하고 다른 손으로 됫병을 어금니에 물려 들이키게 했다. 막걸리를 먹이고 낙지를 통째로 먹이기도 했다.

농촌의 여름은 덥다고 해서 마냥 쉴 수 없었다. 농부들은 뙤약볕에 밀짚모자 그늘 하나 의지하고 논을 맸다. “좌락, 좌락” 무논에 제초기 굴러가는 소리가 들판에 가득했다. 농부도 더위를 먹었다. 농부의 아내는 수박 꼭지를 밥그릇뚜껑처럼 오려내고 속을 약간 긁어낸 뒤 그 자리에 꿀을 부었다. 뚜껑을 닫은 후 밤새 우물 속 찬물에 반쯤 잠기게 담가놓았다가 이튿날 새벽에 숟갈로 퍼먹게 했다.

한낮이 되면 폭염에 마당은 콩 볶는 무쇠 솥 같이 달았다. 이런 볕은 두고 ‘다갈다갈 볶는다’라고 했다. 보릿짚볏가리나 초가지붕은 금방이라도 불을 댕길 것 같았다.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1904-1989)의 그림 ‘녹아내리는 시계’처럼 강렬한 햇살은 모든 것을 녹일 기세였다.

점심 먹으러 집으로 들어온 농부는 등목을 했다. 찬물은 “어푸어푸” 소리를 저절로 나게 했다. 농부의 아들은 농부의 뼈만 남은 앙상한 잔등, 구리 빛이다 못해 검게 타버린 피부와 그 위에 박힌 점을 문지르며 속으로 울었다.

노동에 비해 밥상은 소박했다. 밥 하나 고봉이지 반찬은 풋김치, 풋고추, 된장, 고추장, 마늘종장아찌, 감자찌개가 전부였다. ‘밥 그릇 높으면 생일인 줄 알던’ 시절 보리밥 실컷 먹는 것도 감지덕지였다. 가끔 별식으로 마른 멸치, 미역귀, 꽁치찌개, 미역오이냉채 등이 올랐다. 식사를 마친 농부는 이내 낮잠에 골아 떨어졌다.

“울 밑에 해바라기 꼬박꼬박/ 맴돌다 맴돌다 잠이 들고/ 앞마당에 바둑이도 쌔근쌔근/ 닭 쫓다 닭 쫓다 잠이 들고” 동요가 있다. 강소천 작사 금수현 작곡의 ‘여름’이었다. 여름 한낮에는 집집마다 낮잠을 잤다. 한낮을 ‘박낮’이라고 했다. 잠자리는 바지랑대 꼭대기에 앉아 잠을 자고, 박 넝쿨은 지붕 위에서 자고, 호박잎은 울타리에 매달려 잤다. 농부는 뒷문 문지방을 베고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고 바둑이는 뒤뜰 집 그늘에 누워 ‘백호야 날 살려라’ 활개를 벌린 채 잤다. 닭들은 그늘 진 담벼락 밑에 배를 깔고 엎드려 선잠을 잤다.

낮잠은 많이 잔 것 같아도 실제 시간은 한 시간을 넘지 않았다. 밤에 못 잔 잠을 보충하는 정도로 짧은 시간에 푹 자는 게 여름 낮잠이었다. 그러면 다시 오후 일과가 시작됐다. 농부는 오전에 매다가 있는 논으로 다시 가서 해가 뉘엿뉘엿하도록 논을 맸다. 두벌 논매기 양골치기였다.

1978년 7월 양동산 밑으로 흐르는 기계천의 갱빈 모습이다. 갱빈에는 밭과 버려진 땅 그리고 개울과 모래밭이 어우러져 있었다. 앞줄 왼쪽부터 구경본, 황수향, 강순애, 이순자, 뒷줄 정석주, 황우섭, 황석규 전도사. 정재용 기자
1978년 7월 양동산 밑으로 흐르는 기계천의 갱빈 모습이다. 갱빈에는 밭과 버려진 땅 그리고 개울과 모래밭이 어우러져 있었다. 앞줄 왼쪽부터 구경본, 황수향, 강순애, 이순자, 뒷줄 정석주, 황우섭, 황석규 전도사. 정재용 기자

모두가 잠 잘 시간에 아이들은 큰거랑으로 가서 목욕을 했다. 멱 감는 것을 ‘목욕하다’라고 했다. 수문을 닫아 놓으면 수문 위는 물이 한 길을 넘었다. 아이들은 차례로 둑 위를 도움닫기 하듯 달려가서 비스듬히 물에 뛰어 들었다. 일본의 가미가제(かみかぜ, 神風, 자살 폭격기)처럼 거꾸로 처박히는 아이도 있었다. 더위를 식힌다지만 몸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도로 땀범벅이 됐다. 오후 3시가 되면 갱빈으로 소 먹이러 나섰다. 갱빈 물은 큰거랑 물보다 더 맑아서 깊은 데는 한 길이 넘는데도 얕게 보였다. 얕은 물 에는 피리(피라미)떼가 날쌔게 헤엄쳐 차오르고 기름종개는 모래를 삼키고 뱉고 놀다가 사람이 다가가면 잽싸게 모래를 파고들었다.

도덕산으로 위의 해는 그날도 검붉었다.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박두진 시 ‘해’의 일부) 내일 아침 또 다시 이글이글 앳된 얼굴로 솟아오를 해였다.

더위는 포항으로 가는 22시 08분 막차가 비추는 불빛이 방안을 스캔할 무렵 한풀이 꺾였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던 논물이 식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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