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㊾비 오는 날의 모내기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㊾비 오는 날의 모내기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1.06.10 10:0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맛비에 우장 쓰고 모내기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도 품앗이 나가

한 해 농사의 출발은 모내기였다. 모내기 앞의 논갈이, 물대기, 못자리하기는 모내기를 위한 예비단계였다. 이 모작하는 논은 보리 베기를 마쳐야 논갈이를 할 수 있었다. 모내기를 늦게 한다는 것은 출발선에서 늦게 출발하는 것과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빨리하면 냉해를 입었다. 어른들은 공부해야할 때 공부 안 하는 아이를 교훈할 때 모내기 제 때 안 하는 농부에 비유했다.

모내기는 비 오는 날에도 모내기는 진행됐다. 이미 받아 놓은 날로, 거기에 맞춰서 이 집 저 집 품앗이를 다니고, 놉을 하고, 장을 봐 놓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도중에 놉이 터지면 다른 집 모내기를 마치고 와서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동네를 돌고 또 돌았다. 놉 구하느라 저녁은 뒷전이었다.

이렇다보니 어느 집이 언제 모내기 하는지는 누구나 꿰뚫고 있었다. 꽉 짜인 일정은 농부들을 그물에 걸린 새처럼 옴짝달싹 못 하게 했다. 중간에 사달이 나면 전체 판이 엉망이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농부들은 “죽으래야 죽을 틈이 없다”라고 자조(自嘲)했다.

마을의 동쪽, 양동 갱빈에서 소평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곧게 뻗어있고 길 양쪽으로 모내기를 앞둔 무논이 펼쳐져 있다. 경지정리(1966년) 전 이 길은 구불구불했다. 멀리 무릉산(왼쪽)과 도덕산(오른쪽)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마을의 동쪽, 양동 갱빈에서 소평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곧게 뻗어있고 길 양쪽으로 모내기를 앞둔 무논이 펼쳐져 있다. 경지정리(1966년) 전 이 길은 구불구불했다. 멀리 무릉산(왼쪽)과 도덕산(오른쪽)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6월 들어서면서 비가 잦았다. 비가 안 오는 날에 모내기를 하는 것은 큰 부조였다. 교인들은 새벽기도 시간에 좋은 일기 주시기를 빌었다. 뉴스는 장마 시작 날짜를 예고했다. 모두가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모내기를 마치려고 눈에 불을 켰다. 가뜩이나 모내기로 정신이 없는데 가려 놓았던 보리볏가리에 빗물이 스며들어 김이 피어오르면 농부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발효된 보리는 이미 양곡으로는 글렀고 엿기름으로 밖에 쓸 수 없었다. 그것도 빨리 햇볕에 말려야지 안 그러면 그대로 거름으로 버려졌다.

농부들은 우장(雨裝)을 쓰고 무논에 고꾸라져 모내기를 했다. 짚으로 갑옷처럼 엮은 우장은 비를 가려 줄뿐 아니라 보온 역할까지 해서 모두가 잔등에 둘렀다. 비가 세차게 뿌리는 날이면 빗방울은 흙탕물에 튕겨 모를 꽂으려는 농부의 얼굴을 적셨다.

모내기는 원래 진흙에 사뿐사뿐 갖다놓다시피 하는 게 원칙이었다. 그래야 ‘사람’을 빨리 했다. 가끔 꽂아 놓은 모가 무논에 둥둥 떠다녔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정신없이 모를 꽂고 있는데 못줄 대는 사람이 택호를 부르며 뜬 것을 알리면 그는 못줄을 타넘고 앞으로 들어가서 뜬 모를 빈자리에 다시 꽂아 넣어야 했다.

10시 쯤 되면 논둑에 참이 도착했다. 잔치국수였다. 일꾼들은 뜨끈한 멸치국물에 추위를 녹였다. 그리고 다리에 붙어있던 거머리를 떼어 냈다. 거머리는 마취 기술이 뛰어나서 피부를 뚫어 피를 실컷 빨아먹기 까지 농부들은 아픈 줄도 몰랐다. “고놈 바짝 마른 다리에 뭐 먹을 게 있다고” 타박했지만 거머리가 사정을 봐 줄 리(까닭이) 없었다. 무논에서 가장 징그러운 놈은 왕잠자리 애벌레였다. 그 벌레를 ‘째빈쟁이’라고 불렀다. 전갈을 닮은 데다 길고 넓적한 배에는 털이 숭숭 나 있어(사실은 숨 쉬는 관이었다) 징그럽기 짝이 없었다. 거기다 강한 이빨을 갖고 있었다. 그 이빨에 종아리를 물린 아낙네는 “엄마야!” 고함을 지르며 논둑으로 달아났다. 따끔해서 내려다보니 그놈이 물고 늘어져 있었던 것이다. 드세기로 소문난 아낙네가 기겁을 하고 도망치는 광경에 왁자하고 웃음이 일었다. 꼬집는 것을 ‘째빈다’라고 했다.

모내기는 거의가 품앗이에 날일이었다. 시간적으로 가장 적당한 것은 오후 참 먹고 한 시간여 후에 마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려면 놉을 한 사람 정도 더 하면 됐다. 만약 적게 하여 해가 떨어지도록 일이 끝나지 않으면 주인은 안절부절 못했다. 자신이 놉으로 갔을 때 그들의 모내기는 해가 중천에 있을 때 끝났기 때문이다.

마을 전체 모내기가 막바지에 이르면 ‘돈내기’가 많았다. 품앗이 할 일도 없어 일정 금액에 모내기를 도급(都給)으로 주는 것이었다. 점심을 안 주는 대신 날일보다 품값이 비쌌다. 인원도 날일이 서 마지기에 네 명이라면 도급은 세 명이었다. 마지기 당 한 명꼴이었다. 그들은 날일 때보다 일찍 나가서 모를 찌고 일찍 일을 끝냈다. 교회 새벽종 치면 일어나 약속된 못자리로 나갔다.

모내기철 인사는 “모내기 다 돼 가나”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렇게 물었다. 연세가 많은 분들은 모내기를 ‘모숭기’라고 불렀다. 못자리의 모를 다른 논에 옮겨 ‘심는 것’으로 치면 ‘모심기’가 맞다. ‘심다’를 사투리로 ‘숭구다’라고 했다. ‘모내기’는 못자리에서 모를 ‘들어내다’에서 온 말로 보여 진다.

창마을 동쪽의 모내기를 마친 논에 벼들이 파랗다. 멀리 보이는 산은 어래산이다. 정재용 기자
창마을 동쪽의 모내기를 마친 논에 벼들이 파랗다. 멀리 보이는 산은 어래산이다. 정재용 기자

오뉴월 하루 볕이 무섭다’는 농촌에서 널리 사용되는 속담이었다. 나이가 적은 사람이 버릇없이 굴 때 타박하는 말로도 쓰였다. 모내기가 하지를 넘어서면 ‘한 나절 볕이 무섭다’로 바뀌었다. 조생종은 더 했다.

모내기를 마치고 사흘이 되면 모에 하얀 새 뿌리가 내렸다. 모내기 할 때의 뿌리는 시커멓게 죽어가고 새로 나는 뿌리는 파뿌리처럼 하얬다. 이렇게 활착하는 것을 ‘사람하다’라고 했다. 이틀째까지 잎 끝이 말라가며 연두색이던 모가 새 뿌리가 나면서 파릇파릇 바람에 나풀거렸다.

농부는 짚 소쿠리에 요소비료를 담아 거짓꼴로 ‘웃비료’를 뿌렸다. 그는 단순히 비료만 하는 게 아니라 중간에 물에 떠 있는 모가 보이면 새로 꽂고, 포기 빠진 데가 있으면 보식(補植)을 했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논 한 귀퉁이에 못단 하나를 통째로 꽂아두었던 터였다.

모내기를 마치고 나면 그 해 농사의 반은 지은 셈이었다. 제초작업, 농약살포, 물대기는 차후의 일이었다. 마을 계중에서는 단체로 여행을 가고, 그 동안 미뤄뒀던 병원 진료를 가고, 집안도 둘러보고, 믿는 사람들은 용문산으로 청천다락원으로 산상부흥회에 갈 여유가 생겼다.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농부의 몫은 거기까지고 나머지는 하늘 뜻이었다. 농부들은 형산강 물이 기세등등하게 마을을 향해 차오르면 선조가 빗속에 몽진을 하듯 북부학교로 도망을 쳤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