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25 당시 ‘융단폭격’은 필요악이었나
6· 25 당시 ‘융단폭격’은 필요악이었나
  • 유무근 기자
  • 승인 2021.06.07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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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彼我) 2만 7천여 명 사상자 발생, 민간인 사망 희생자도 많아

 

6.25 전쟁 시 미군의 융단폭격 장면. B-29 중폭격기 98대가 왜관 약목 북쪽 일원에 960t 푹탄을 투하하고 있다. 워키피디아

한국 전쟁 당시 융단폭격은 UN군으로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작전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나 전세를 승기로 바꾸고 북진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경북 칠곡군 약목면은 낙동강 철교에 인접한 곳으로 한국 전쟁 때 피해가 컸던 지역이다. 칠곡군 약목면 자료와 각종 매체 자료를 토대로, 낙동강 건너 관호리부터 덕산, 북삼, 가산면 유학산까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융단폭격 내막을 들여다본다.

유학산 고지를 인민군에게 빼앗기자 유엔군은 8월 15일 미 8군 사령부에 급히 항공 지원을 요청했다. 유학산 정상 839고지는 대구가 바라보이는 중요한 지형이라 유엔군 측은 이곳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839고지 쟁탈은 곧 다부동 전투에 승패를 가늠하는 요충지였다. 다부동 전선은 대구와 부산을 점령하려던 인민군의 주공격 선인 반면, 유엔군에게는 그곳을 지키는 주저항선이자 보루(堡壘)였다.

지원 요청을 받은 미군 사령부는 이튿날 8월 16일 정오를 전후로 낙동강 전선 방어지역에 융단폭격한다는 작전 계획을 시달했다. 이날 정오부터 26분 동안 왜관, 약목, 석적, 구미 일원(폭 5~6km. 거리 67.2km) 폭격 지점에 B-29 폭격기 5개 편대 98대가 약 960t의 폭탄을 쏟아부었다.

융단폭격 폭탄 탄피를 군인들이 트럭에 싣는다. 이후 일대는 5년 동안 풀한 포기 돋아나지 않았다. 칠곡군 제공

유엔군의 폭격이 시작되자 그 일대는 삽시간에 지축이 흔들리는 폭풍의 불바다로 변했다. 피폭 지점 일대는 폭음과 폭풍 그리고 검은 연기와 파편으로 하늘조차 부옇게 가려졌다. 폭탄은 투하할 지점 수직 아래로 떨어지는 게 아니다. 폭격기의 속도 때문에 떨어지는 폭탄은 관성에 의해 포물선에 가까운 궤적을 그리며 떨어졌다. 폭탄이 떨어진 곳은 인민군 진지뿐만 아니었다. 인민군 진지 외 장소에 더 많이 떨어졌다. 그러다 보니 인민군 못지않게 민간인들과 피난민의 피해도 매우 컸다. 

미 8군 낙동강 인근 적 4만 명 식별. 적들은 몰려오고 길은 끊겼다  칠곡군 제공

유엔군은 융단폭격이 끝나자 전날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대반격 작전을 펼쳤다. 그날 국군 1사단 13연대는 수암산 건너 328고지를 다시 빼앗고, 1사단 12연대는 다부동까지 침투한 적을 밀어낸 뒤 유학산 8부 능선까지 탈환했다. 또 1사단 11연대도 가산 유학산 고지를 되찾았다.

낙동강 방어와 유학산 정상 839고지를 둘러싼 ‘다부동 전투’는 한국 전쟁 중 가장 격렬한 전투로 기록됐다. 1950년 8월 초에 시작해 그해 9월 24일에 끝났다. 50여 일의 동안 유엔군 1만여 명, 인민군 1만7천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이 기간에 유학산 839고지의 주인은 아홉 차례나 바뀌었다. 빼앗기고 되찾는 전투로 시체가 겹겹이 쌓여, 일명 아이스크림 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유학산 능선과 골짜기는 시체로 산을 이루고 전사자의 피로 시계를 이루게 했다. 문자 그대로 ‘시산혈하’(屍山血河)의 전투였다.

채 피워보지도 못한 체 조국의 방패로 사라지다.  칠곡군 제공

융단 폭격은 대상을 가리지 않은 무차별 공격이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앞서 프랑스 해안에 쏟아부은 대폭격 작전의 원용이었다. 한국 전쟁 당시 융단폭격은 엄청난 피해와 아픔도 있었지만, 융단폭격 작전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선택한 불가피한 ‘필요악(必要惡)’작전이었다.

군인들은 북으로 북으로 피난민들은 남으로 남으로.  칠곡군 제공

한국 전쟁이 중공군 참전으로 인하여 교착 상태에 빠지자 맥아더 장군은 한반도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기도 했다. 이 사실은 곧바로 이북 전역에 미군이 조만간 원폭을 떨어뜨린다는 소문이 퍼졌고, 수많은 이북 주민들이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미군의 원폭 투하에 죽는다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대거 이남으로 피난했다. 그만큼 미군의 폭격이 이북 주민들에게는 큰 두려움을 주었다.

6.25 참전 무공 수훈자협회 칠곡군 지회 김화석 회장은 “UN 연합군의 융단폭격 결단이 한국 전쟁 승리의 주역”이라면서 “만약 융단폭격이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거듭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