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4)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4)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1.05.31 1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천의에 순응하고자 생각을 돌린 것이다.
동토를 녹이려 불어오는 훈풍을 품은 봄바람은 아니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길을 잃은 미아처럼, 동서남북을 잃어버린 것이다.
2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범어동 아파트 숲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2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범어동 아파트 숲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고모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처절한 몸부림을 내 아픔으로 승화시킨 할머니는 보호자로써, 엄마로써 애간장을 녹여 지내는 동안 의사의 진료와 치료가 마지막 희망이라 여겼기에 무지렁이라 탓해도, 앞이 꽉 막혔다 탓해도, 까막눈이라 탓해도, 탄탄대로의 좋은 길을 두고 굳이 돌무지 너덜의 어려운 길로 가냐고 윽박질러도, 나아가 그 어떤 굴욕도 여태껏 참고 또 참는 가운데 어금니를 지그시 물어 인내하여 지내온 것이다. 그 지난한 과정 속에 할머니가 몸소 깨달은 것은 있는 듯 없는 듯 흐르는 세월에 고모의 생을 맡겨 정성만이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후 할머니는 무당, 의원, 특히나 의사나부랭이들을 잡상인인 방물장수나 보부상 등으로 치부하여 따따부따, 시시콜콜한 관여를 단연코 거부했다.

이는 딸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 지켜주고 싶었고 여자로써의 정체성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피를 나눈 모녀지간을 차제하고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볼 때 환자와 보호자, 의사란 야릇한 관계를 떠나 그들은 무모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머리를 수박 통으로 여기고 몸뚱이와 수족은 통나무나 나뭇가지로 인식하여 머리를 톱을 켜듯 자르고, 칼로 뼈를 깎고, 아픈 배를 무 썰 듯 하는 것이 수술이라지만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싶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인명은 재천’이라! 팔자소관을 들어 역천을 포기하고 보니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고질병이 든 딸을 막무가내 살리려 든 것도 어떻게 보면 역천인가 싶어 겪는 아픔이라 여긴 것이다. 천의에 순응하고자 생각을 돌린 것이다. 결정을 하고 들자 백번 돌아봐도 잘했다 싶었다. 설령 고모가 천명에 따라 자신보다 저승길을 앞장선다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여긴 것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머리만 돌리면 피안이라고 무엇보다 고모가 할머니의 의중을 읽어 내고는 얼굴 표정이 밝아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모습이 할머니를 안 먹어도 배부르게 했다.

문지방에 먼지가 일 듯 드나들던 사람들이 모조리 물러가자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집안이 무주공산 같아 심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어느 따뜻한 날이었다. 배꼽마당 가득히 봄볕이 팽팽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회색빛으로 색이바랜 초가지붕으로 자글자글 내려앉아 하얗게 부서지는 봄볕은 아지랑이를 아련하게 피어 올리고 있었다. 누가 날렸을까? 저 멀리로 키 높은 미루나무 꼭대기에 가오리연 하나가 걸려있다. 이는 바람에 순응하여 하늘에다 긴 꼬리를 내밀어 한가로이 손을 흔들 듯 꼬리를 흔드는 날이었다. 먼데서 개가 짖듯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고샅을 휘돌아 몽롱하게 들리는 그런 날이기도 했다. 절로 하품이 일었다. 누가 봤으면 주책없다고, 찢어져라 벌린 입안으로 파리가 들락날락 거릴 거라고 핀잔이라도 받을 법한 날이다.

나른한 눈으로, 잠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고모가 잠든 방문을 일별하고 무료함도 달랠 겸 툇마루에 걸터앉은 할머니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난 1여 년 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으로 둥둥 떠왔다. 눈앞으로 떠 오는 그간의 일들이 어느 화가가 물감을 듬뿍 찍은 붓을 마구잡이로 휘둘려 그리는 화폭처럼 어지럽다 여겨지는 것이다.

딸의 병을 치료하고자 무당, 의원, 의사들의 소매 끝을 부여잡고 안달복달, 애걸하고 애원했던 지난 1년간의 일들이 일진광풍의 노도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쓸려나간 듯 여겨졌다. 철지난 해수욕장의 매끈한 백사장 같고 바람이 휩쓸고 간 텅 빈 운동장처럼 공허하게 다가왔다.

그 바람이 딱히 어떤 바람인지 느끼지 못한 가운데 신기루처럼 나타나 제 흥에 겨워 너울너울 춤사위를 펼치다가 북극의 오로라처럼, 능구렁이가 꼬리를 사리듯 은근슬쩍 흔적을 지운 것만 같았다. 이 바람, 저 바람이 교차하는 가운데서 일어나는 회오리 속을 정처 없이 헤맨 것만 같았다. 구층 지옥 불에 떨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살아난 기분이었다. 할머니가 한줌이나 더 늘어난 흰머리가 애교머리처럼 앞이마로 흘러내려 눈을 가리자 삭정이 같은 손으로 쓸어 올릴 적에 또 미미한 바람이 불었다. 밉고 싫어서 고개를 ‘훼훼’내졌는데도 그칠 줄 모른다. 눈이 절로 감기는 이상야릇한 바람이다.

바람! 지금껏 바람이라면 허리케인, 토네이도 같은 태풍만 무서운 줄 알았다. 하지만 바람이란 형체도 냄새도 없는 것이 어느 바람이나 다 위험하고 무섭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뱃사람들이 남풍이라 부르는 마파람은 모래 파먹기를 천직으로 알고 있는 게의 눈을 감추게 했다. 강화도로 피신 중인 왕을 태운 일엽편주를 뒤집을 듯 뒤흔들어 불어 닥친 바람은 뱃사공 손돌을 죽음으로 몰았다. 그리고 그 피를 바탕으로 손돌바람이 되었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하늬바람은 아름다운 이름에 걸맞지 않게 때 아닌 추위를 몰고 온다. 또 늦봄부터 초여름에 걸쳐 태백산맥을 넘어 영서 지방으로 부는 높새바람은 한창 자라기 시작한 농작물에 피해를 입힌다. 하지만 이는 동남풍에 비하면 홍등가의 눈웃음 같은 애교에 불과하다.

하늘에 가깝게 높다랗게 단을 쌓아 덩그렇게 올라앉은 제갈공명이 칠일 밤낮동안 치성을 드린 끝에 칠성단에서 빌러온 동남풍이 할머니가 생각하건대 제일 무서운 바람이라 여겼다. 동남풍은 은은하고 생명을 품은 바람이다. 즉 우리나라로 볼 때 봄바람인 것이다. 입김 한 번에 싹이 트고 또 한 번에 입김에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고마운 바람이다. 할머니는 맨 처음 분명 동남풍이라 생각하고 거는 기대가 컸다. 꿈과 희망을 마음속으로 가득 품었다. 고모가 분명 치료 되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 바람은 조조에게 그랬던 것처럼 할머니에게도 동토를 녹이려 불어오는 훈풍을 품은 봄바람은 아니었다. 그 동남풍은 조조를 사지로 몰아가듯 할머니를 시궁창으로, 진창으로 숨 쉴 틈 없이 몰아 붙였다. 조조가 이끄는 위나라 수군의 군영을 집어 삼켜 불지옥으로 만들듯 몰아 붙였다. 삶과 죽음이 따로 없었다. 배와 인마를 포함하여 보이는 족족, 닥치는 대로 모조리 태워서 재로 만들어 몰아 붙였다. 그 여파로 조조는 똥줄 빠져라 도망 중에 목숨처럼 아껴 애지중지 길러온 수염을 자르고 또 화용도에서는 제갈공명의 지령에 따라 매복 중이 관운장의 청룡언월도 아래, 영웅호걸로 치면 참으로 구차한 변명으로 목숨을 구걸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할머니가 그동안 갈팡질팡 맞은바람 역시 꾀 많은 조조가 혼비백산 맞았다는 동남풍이었을 것이다. 고모의 치료를 위해 벌인 지난날의 기억 속의 바람은 꼭 제갈공명이 하늘에서 빌려온 그 동남풍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영웅호걸이란 칭호를 목숨과 바꾼 조조와 헌신짝 버리듯 버린 자존심을 떠나 버선목 뒤집든 한 자신과 뭐가 다를까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순풍처럼 몰아닥친 동남풍은 조조의 지리멸렬한 수군을 한 줌 재로 만든 것처럼 할머니의 가슴에 한 줌, 회색 빛 재만 남기고 들판 너머로, 앞산의 고개를 어물쩍 넘어간 것이다.

늙은 소나무가지에 달린 솔방울 하나 달랑 떨어뜨리고 사라진 것이다. 솔방울이 굴러간 흔적 치고는 너무 쓸쓸하고 초라하다 생각한 것이다. 무언가 손에 쥐고자 했지만 모래를 움켜쥔 것처럼 아무것도 건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여전히 고모는 처음 그대로 누웠고 사경을 헤매는 가운데 끙끙 앓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떻게 생각해보면 끝이 없는 긴 터널을 어렵고도 어렵게 건너온 기분도 들었다. 컴컴한 굴속에서 살려 달라고, 사람 살리라고 목이 터져라 아우성치다 간신히 한줄기 빛을 향해서 무작정 달려온 기분이었다. 눈이 오면 눈을 맞고 비가 오면 비를 맞는 것처럼 알몸뚱이로 풍찬노숙,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눅진한 굴속을 허우적거려 지나왔건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황량한 벌판을 바람이 휩쓸고 간 것처럼 가슴 속이 허허하고 서늘하다. 당체 일이 손에 잡히질 앉는다. 양손을 들어 탈탈 털고 마음은 모든 것을 놓았다고 여겼지만 여전히 생의 끝을 잡고 싶고, 병들어 고통 속에 허덕이는 딸을 치료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할 일이 무엇인지? 또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고려장으로 깊은 산속에 들어 오늘내일하는 노인들처럼, 서울 한복판에서 길을 잃은 미아처럼, 동서남북을 잃어버린 것이다. 물 위를 떠도는 부평초와 같은 신세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분명 무언가 할 일이 있다 생각에 빠진 할머니가 불현 듯 벌떡 일어나 고모가 앓아 누운 방문을 벌컥 여는 것이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