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어날 추억] ⑪떡보리와 보리개떡
[꽃 피어날 추억] ⑪떡보리와 보리개떡
  • 유병길 기자
  • 승인 2021.05.2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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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익은 보리알을 가마솥에 넣어 불을 때면서 소금물을 뿌려 껍질을 말려 떡보리를 만들었고, 고운 보리겨에 사카린 술약을 넣어 솥에 쪄서 보리 개떡을 만들었다.
노랗게 익어가는 보리이삭. 유병길 기자
노랗게 익어가는 보리이삭. 유병길 기자

1950년대 봉강리(경북 상주시 외서면)의 모든 논밭에는 벼를 베어 낸 후 보리와 밀을 파종하였다. 습기가 많은 논에는 습기에 강한 밀을 심었다. 밀보리를 파종한 논과 밭에는 뚝새풀이 나서 농사를 짓는 농부를 힘들게 하였다. 메마른 밭에는 조금 적게 났지만, 습기가 있는 논에는 뚝새풀이 많이 나서 논바닥의 흙이 안 보이는 곳도 많이 있었다.

밀보리 밭에 많이 자라 농업인을 힘들게 한 꽃이 핀 뚝새풀. 유병길 기자
밀보리 밭에 많이 자라 농업인을 힘들게 한 꽃이 핀 뚝새풀. 유병길 기자

민족의 대명절인 설날이 지나면 먹거리 양식이 떨어져서 부잣집에서 장내 쌀을 빌리는 농가가 많아졌다. 농사가 적은 젊은 남자들은 머슴으로 들어가서 새경(일 년 동안 일한 대가로 주인이 머슴에게 주는 곡물)을 받으면서 아침에 일어나면 일하는 집에 가서 아침을 먹고 종일 일하고 저녁을 먹고 집으로 왔다. 상일꾼은 일 년에 새경으로 쌀 5가마 정도를 받아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

입춘이 지나 땅이 풀리면 온 가족들이 호미를 들고 논· 밭에 나가 쪼그리고 앉아서 뚝새풀을 뽑았다.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팠지만, 아이들도 할머니와 어머니가 하는 일을 도와드렸다. 양식이 떨어진 농가는 이때부터 들과 산에서 쑥 등 나물을 뜯어 먹고 살았다. 동네 초상집이나 잔칫집에 일을 하러 가서 전 한쪽이라도 먹을 게 생기면 엄마들은 먹지 않고 광목 치마폭에 숨겨 얼른 집에 아이들을 가져다주었다.

밀보리 이삭이 팰 때 뚝새풀도 꽃이 피고 밀보리가 익어서 베는 6월 상순경 뚝새풀도 씨가 익어 말라 죽었다.

1950~60년대 벼 보리를 찧는 디딜방아
1950~60년대 벼 보리를 찧는 디딜방아. 유병길 기자

5월 하순이면 햇볕을 많이 받는 밭둑 밑의 보리가 일찍 익었다. 노란 보리 이삭만 잘라 다래키에 담아 메고 와서 나무 막대로 타작을 하였다. 큰 가마솥에 불을 때면서 보리를 넣고 소금물을 뿌려가며 나무 주걱으로 저으면서 보리 껍질을 말렸다. 나무 절구, 디딜방아에 찧어 떡보리(설익은 보리의 알갱이)를 만들었다. 속껍질이 덜 벗겨져 거칠거칠한 떡보리로 보리밥도 지어 먹었고, 보리죽도 끓여 허기진 배를 채웠다. 봄부터 햇보리가 나오는 6월까지의 보릿고개는 너무나 높아 넘기가 힘들었다. 그때를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보리 밀 호밀 등 맥류는 망종(24절기 중 아홉 번째 절기)이 회갑이다. 망종이 지나면 줄기가 그냥 말라 밀보리를 베었다.

배가 고플 때는 밀가루 빵을 집에서 쪄서 먹었다. 밀가루에 소다, 술약, 사카린을 넣고 반죽하여 몇 시간 두면 부풀러 올랐다. 이때 큰 솥에 물을 붓고 채반을 넣고 삼베 보자기를 펴고 반죽한 것을 고루 펴고 솥뚜껑을 덮고 불을 때어 빵을 쪘다. 김이 나고 조금 있다가 솥뚜껑을 열면 빵 특유의 냄새와 노랗게 부풀어 오른 밀가루 빵을 만난다. 부엌칼로 두부모 자르듯이 잘라서 한 덩어리 주면, 뜨거운 줄도 모르고 큰 구멍이 듬성듬성 난 밀가루 빵을 맛있게 먹었다. 부모님은 들일하러 가고 집에 없으니, 초등학교 다니던 여학생들은 누구나 빵을 쪄서 동생들과 같이 먹었다. 누나가 없는 남학생들도 밀가루에 술약을 넣고 반죽하여 조금 두었다가 밥솥에 들기름을 바르고 밀가루 반죽을 고루 펴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잠시 후 부풀어 오르는 맛있는 빵이 되면 동생들과 나누어 먹었다.

기말기 정미소의 고병난 사장님은 보리를 찧을 때 처음 나오는 거친 껍질은 받아내고 나중에 나오는 고운 보릿겨를 따로 받아주었다. 밀을 빻을때도 밀가루가 많도록 밀껍질이 벗겨져 누른 밀가루가 나올 때까지 빻아 주었다. 사모님은 정미소에 따라온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행갈 사는 염성길(81)씨는 하굣길에 배가 고파서 힘없이 걸어오는데 주먹밥을 주어서 행복했다는 옛이야기를 하였다. 고운 체로 쳐서 밀가루같이 보드라운 보릿겨에 소다나 술약, 사카린을 넣고 반죽하여 몇 시간 발효시켰다가 삼베 보자기에 고루 펴서 밀가루 빵과 같이 쪘다. 김이 오르고 난 후에 솥뚜껑을 열면 밀가루 빵같이 많이 부풀어 오르지는 않고 검은색의 보리 개떡이 만들어져 칼로 작게 잘랐다. 고운 체로 쳤어도 밀가루같이 부드럽지 못하여 딱딱하고 까맣고 맛은 없었다. 사카린의 단맛과 배고픔에 요즘은 개들도 먹지 않을 보리 개떡을 많이 먹었다. 까만 보리 개떡은 가족끼리 논밭에 일할 때 새참으로, 어린애들은 군것질로 먹었다.

밀가루를 반죽하여 국수를 밀때 사용한 홍두깨. 유병길 기자
밀가루를 반죽하여 국수를 밀때 사용한 홍두깨. 유병길 기자

고운 보릿겨를 물에 반죽하여 밀가루 국수같이 홍두깨로 밀었다. 잘 밀리지 않아 두껍게 밀어서 칼로 썰어 삶으면 면발은 없고 끊어진 검은 국수가 되어 숟가락으로 떠서 먹었다. 그 보릿겨 국수도 마음 놓고 배부르게 먹을 수가 없었다. 자주 씻지도 않고 흙이 묻어 새까만 손으로 새까만 보리 개떡을 들고 흘러내리는 누른 코를 훌쩍거리며, 아껴 먹는다고 조금씩 떼어먹던 아이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1970년대 통일벼 재배를 하면서 모내기를 일찍 하려고 밭에만 밀보리를 심었다. 뚝새풀은 70년대 중반까지 농업인을 괴롭혔다. 풀을 못 나게 하는 잡초 약이 처음 공급되면서 한풀 꺾이었다. 가을에 밭에 밀보리를 파종하고 잡초 약 입제를 300평당 1봉(3kg)을 뿌렸다. 뿌릴 때 습기가 맞은 밭은 거의 뚝새풀이 나지 않아 밀보리 농사도 쉬워졌다. 80년대 정부에서 보리 수매를 안 하면서 보리재배를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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