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3)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3)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1.05.24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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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사무적인 말을 할머니께 건넸다
휘 갈겨 쓴 검은 글씨도 공히 종이로 보일 뿐이었다
손은 본능에 따라 자꾸만 사타구니 쪽으로 향한다
2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범어동 아파트 숲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2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범어동 아파트 숲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수차례에 걸쳐 검사를 한다며 모기떼가 달라붙듯이 피를 뽑더니 마지막엔 말라비틀어진 몸에 이유를 불문 칼을 대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전제 조건으로 죽어도 이의를 달지 않겠다는 각서에 서명이 먼저라고 했다. 알지도 못하는 글이 빼곡한 종이를 쪼가리를 턱밑으로 내밀며 엄지손가락에 붉은 인주를 듬뿍 찍어서 불문곡직 지장을 찍으라는 것이다. 그들의 형태로 보아 아예 죽이자는 말과 다름없었다. 단지 그들은 고모의 몸은 의학계의 발전을 위한 연구대상일 뿐이란다. 기왕에 본인들의 지식으로는 고치지 못할 병, 두고두고 무능이란 불명예가 꼬리처럼 따라다닐 바에는 아예 잡초를 뽑듯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전적에 흠집을 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듣도 보도 못한 희귀한 병이라 더 더욱 그렇단다.

그들의 얼토당토않은 요구에 할머니가 그럴 바에는 진즉에 포기했지 지금까지 왜? 무슨 영광을 보자고 애지중지 살려서 왔겠냐고 항의를 하면 그들은 유들유들한 표정을 지으며 학생을 훈계하듯, 가르치듯

“아주머니 꼭 그렇게만 생각할 수만은 없죠! 때에 따라서는 과감한 결단으로 숭고한 희생도 필요한 겁니다. 딸의 희생이 현재로 봐서는 그런 겁니다. 후세의 많은 사람들이 크나큰 은덕을, 혜택을 입을 겁니다. 이유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을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건질 겁니다. 어머니의 그 큰 뜻에 감사할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의태가 아들인 도지가 아닌 뛰어난 제자 허준에게 한의학의 발전을 위해, 후세 사람들의 무고한 희생과 보다 안정된 삶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의 시신을 내주듯 어떤 때는 그런 과감한 결단의 절대적인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런 살신성인의 희생을 밑거름으로 허준은 한의학을 집대성한 동의보감을 편찬하지 않았습니까? 이 얼마나 뜻깊은 일입니까? 따님의 거룩한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할 겁니다. 현대 의학은 획기적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어머니와 따님의 이름 세자가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현명한 결단을 바랄뿐입니다”라며 지극히 사무적인 말을 할머니께 건넸다. 할머니가 그들의 사탕발림 같은 말을 듣고 있는데 구렁이가 온몸을 칭칭 감아오는 듯 소름이 끼쳤다.

듣기에 따라서 자신들의 의술이 구암 허준만큼 훌륭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희생이 없었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또 그들은 의학의 발전을 위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둥그런 과일이나 죽은 통나무로 본다고 번지르르하게 표장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을 때 숫제 사람의 형상만, 인피로 만든 사람의 탈을 쓰고 있을 뿐 사람같이 않아 보였다. 도살장의 백정은 “엣~ 다”덤으로 고깃살이라도 얹어주는 인정이라도 있건만 국가를 등에 업어 허가를 내 인간백정은 피도 눈물도 없어 보였다. 이마에 바늘 침도 안 들어갈 것 같았다.

아무리 비루한 목숨이라도 귀하고 귀한 것이 사람목숨이다. 그 무엇과도 흥정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목숨을 두고도 자세한 설명 따위는 없고 오로지 결론만 있었다. 종이쪼가리에 지장을 찍고는 물건 내놓듯 내놓으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할머니가 아니었다.

붉은색 인주, 지장이란 말은 귀 딱지가 않도록 들었지만 못들은 척 시치미를 떼고는 그들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이삭을 줍듯 티끌만치라도 알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생각처럼 싶지 않았다. 비위를 맞추어가며 사정사정해야 겨우 몇 마디를 주워듣는 것이 고작으로 멀쩡한 속이 썩어문드러질 지경이었다. 워낙에 답답하다보니 생병이 날 지경이다. 가슴을 치는 할머니는 고모의 병만 아니라면 부지깽이를 들어 비오는 날 먼지가 일도록 패주고 싶은 심정을 애써 눌러 참는 듯 보였다. 이마에 지난날의 삶을 훈장처럼 아로새긴 굵은 주름이, 눈가로는 자글자글한 잔주름이 풍랑에 물결이 일 듯 깊게 패이고, 얼굴이 일그러지고, 목을 지나는 울대를 둘러싼 근육이 씰룩거리는 것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사무적이고, 냉담하고, 딱딱하기 이를 데 없었다. 따라다니는 간호사도 마찬가지였다. 예쁘장하게 생긴 것이 처음에는 싱긋싱긋 웃는 모습에 “아주머니! 아주머니”하는 모양새가 좀 곰살궂다 싶더니 담당의사에게 “함부로 아는 척 주둥아리를 놀리지 말라”는 쓴말 한마디를 들었는지 어느 때 부턴가 새치름한 본새가 쌀쌀맞기 그지없다. 게다가 입까지 지퍼를 채운 듯 앙다물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무지렁이 촌부와는 말을 섞지도 상종을 하지도 않겠다고 입을 맞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네들의 공통된 목적은 쉽게 포기할 수 없었는지 자신들의 입장을 내세워 수시로 부추여 왔다. 잊을만하면 옆구리를 들쑤셔 자신들의 요구만 통보 형식으로 할머니에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촌집 몇 채 값의 돈을 내고 병원에 입원을 시켜 전문적인 치료를 받던지 아니면 고스란히 딸을 내주면 일체의 비용은 자신들이 부담하여 연구대상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살아있는 사람을 살릴 생각은 애당초 없고 그저 연구대상이란다. 차후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듯 죽여도 좋다는 각서를 쓰고 말이다. 게다가 그들이 적어주는 약방문은 그저 흰 것은 종이요! 영어로 휘갈겨 쓴 검은 글씨도 공히 종이로 보일 뿐이었다. 말조차 전문 용어라 그런지 딴 나라에서 온 듯 못 알아듣는 것 십 중 팔구다. 한문이라면 물어물어 또 어떻게 해보겠는데 코쟁이들만이 쓴다는 그 어렵고도 어렵다는 꼬부랑글씨다. 한눈에 봐도 올챙이무리가 꼬물거리는 것 같고, 935년 일리천 전투에서 맞닥뜨린 왕건과 견훤의 군사들이 어울린 듯 어지러워 보이는 것이 흡사 지렁이들의 전쟁터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한참을 보고 있자니 긴 여행 끝의 차멀미와 같아 욕지가 일 듯 절로 속이 울렁거린다.

그즈음 할머니는 고모를 타인들의 손에 맡긴다는 것에 대해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문지방이 닳도록 분답기만 분답고 무엇 하나 도움이 안 된다고 여긴 것이다. 게다가 고모가 그들을 너무 싫어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본인도 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리는지 순순히 몸을 내 맡기던 것이 이제는 낯선 사람만 문지방을 넘어서도 경기를 하듯 몸을 움츠린다. 솜이불을 둘둘 말아서 아락바락 저항이다. 아마도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어느 정도 예의를 갖춘 무당이나 의원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의사 나부랭이가 들이닥칠 때면 고모의 저항은 늘 불가항력적이었다. 치료를 핑계로 옷을 벗겨 간호사들이 사지를 붙잡다보니 무방비 상태나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사람이 많든 적든 고모가 입고 있는 옷이랑 옷은 홀라당 벗겨 전라로 만든 뒤 솜이불이 불쑥불쑥 들쳤다. 그럴 때마다 고모의 알몸은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다. 그것이 치료방식이고 자신들은 남자가 아닌 그저 의사일 뿐이라고 했다. 병을 진료하고 치료를 위해서는 원래가 이러저러하여 당연하다고 했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환자 또한 몸이 아프다 뿐이지 인간으로써 최소한의 인격을 존중 받고 싶은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병을 굴리듯 온몸을 마음대로 굴렸다. 오한이 들어 추운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고모는 환자이기에 앞서 여자다. 성한 몸이라면 S라인 등을 들어 미(아름다움)라도 뽐낼 일이지만 까무잡잡하고 말라깽이 몸이라 망망대해의 심연으로 가라앉고 싶을 만큼 죽고 싶은 심정이다. 손은 본능에 따라 자꾸만 사타구니 쪽으로 향한다. 발에 밟힌 지렁이도 꿈틀거린다는데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것이다. 살고 싶은 본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해서 살 필요가 있을까 회의가 든 것이다.

그렇다고 할머니가 전체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단지 처해진 현실이 암담할 뿐이었다. 부러진 다리를 아교풀로 붙이듯 붙이고, 배를 갈라 탈이 난 창자를 과도로 썩은 과일 도려내듯 도려내 죽어 나자빠질 사람들을 감쪽같이 치료를 한다는 사실을 할머니라고 귀동냥으로 들어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멀쩡한 사람이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가 송장으로 나왔다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린다. 이래저래 할머니는 두려운 것이다. 게다가 고모가 삶의 의지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제 겨우 생기기 시작한 핏덩이에 불과한 태아도 살고자하는 의지를 보인다며 낙태수술을 전문적으로 하는 산부인과 의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지 않는가? 새까만 눈이 반들반들 노려보는데 이것도 살인이다 싶어 가슴이 섬뜩하더라고! 그런 와중에 보인 의사들의 폐부를 찔러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할머니의 가슴에 촘촘하게 대못을 박아 오는 것이다. 더 없이 실망스러운 것이다. 고모가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는 것이 그랬다. 무엇이 이익이고 손해인 것을 떠나 본능적으로 몸이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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