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㊽우리나라 독립 했나 안 했나?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㊽우리나라 독립 했나 안 했나?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1.05.24 10:0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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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해방과 6.25전쟁 분위기가 남아있던 시절
가난한 삶에도 위트와 행복 가득

옛날에 어른들이 애들 데리고 노는 장난은 지금 생각해보면 약간 무지막지했다. 어른이 어린 아이 뒤에 서서 양손의 엄지와 검지로 아이의 두 귀를 잡고 물었다. “서울 구경 시켜줄까?” 예, 아니오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두 귀를 들어올렸다. 아이는 기겁을 했다. “한 번 더 시켜줄까?” 아이는 저만치 도망을 쳤다.

같은 방식으로 귀를 잡고 아이에게 물었다. “우리나라 독립 했나 안 했나?” 나라를 빼앗기고 36년 만에 독립했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얘기다. “독립 했어요” “대한독립 만세, 만세, 만세” 세 번 귀를 들어 올렸다. 애는 귀가 아프다고 양손을 귀에 대고 쩔쩔맸다. 귀를 다시 잡고 같은 질문을 던졌다. “우리나라 독립 했나 안 했나?” 같은 대답을 할 리 만무했다. “독립 안 했어요” 아이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힘써라, 힘써라, 힘써라” 다시 귀를 당겨 올렸다.

보리밥을 많이 먹는 시절이라 방귀가 잦았다. “나, 재밌는 얘기 하나 해 줄까?” “예” “네 엄마가 방구 팔러 가다가 도락꾸(truck) 동태(바퀴)에 찡겼어(끼였어)” 그리고 노래를 시작했다. “○○ 엄마는 방구재이(방귀쟁이) 방구 팔러 가다가 도락꾸 동태에 찡겼네. ○○야 밀어라 잉잉잉, △△야 당겨라 잉잉잉, □□야 밀어라 잉잉잉” 엄마 구하기 노력에 자식들을 총동원시켰다. ‘잉잉잉’은 용쓸 때 내는 소리다.

설악산 여행 중 1978년 2월 20일 흔들바위를 배경으로. 정재용 기자
설악산 여행 중 1978년 2월 20일 흔들바위를 배경으로. 정재용 기자

또래끼리 마주보고 앉아, 다리를 뻗쳐 서로 어긋맞게 끼워 넣고, 한 아이가 손을 들어 차례로 다리를 두드리며 노래했다. “이 거리 저 거리 갓 거리, 동태 바꾸 돕 바꾸, 수머리 바꾸 돕 바꾸, 가사머리 장두 칼 친 포” ‘포’에 손이 닿는 아이가 다리를 거둬들였다. 남은 다리를 두고 다시 시작했다. 거듭한 후, 맨 마지막까지 남으면 벌칙으로 꿀밤을 맞는 놀이였다. 이마에 장지로 튕기는 꿀밤이었다.

소녀들은 고무줄놀이를 했다. 아기를 업은 채 고무줄을 잡고 있다가 줄넘기 차례가 되면 아기를 땅바닥에 내려놓고 줄을 넘었다. 가랑이를 높이 들어 올려 높은 데 있는 고무줄을 걸어 내렸다. 그리고 다리에 감고 풀어가면서 노래에 맞춰 뛰었다. 전체가 함께 불렀다. “유리가꾸나, 유다오 가라나즈 유다오유, 넷네꾸 넷네꾸 한 판이요”고무줄은 판을 거듭할수록 한 뼘씩 위로 올라가고, 판은 고무줄을 놓치지 않은 한 거듭됐다. 아기는 흙투성이가 되어 혼자 놀고 소녀의 단발머리는 신나게 나풀거렸다.

이런 노래도 있었다. 마태 구루마동태(수레바퀴) 누가(뉘가) 돌렸노(돌렸나)? 집에 와서 생각하니 내가 돌렸지. “할배요 할배요 용서해주소” “안 된다 이놈아 경찰서가자” “경찰서 서장님 용서해주소” “안 된다 이놈아 재판소 가자” “재판소 소장님 용서해주소” “안 된다 이놈아 총살 받아라” “탕탕” . 노래를 부르면서도 ‘공연히 자수해서 총살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심하면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라고 놀렸다. 당시 콘크리트 다리(‘공굴’이라고 불렀다) 밑에는 움막을 짓고 사는 거지들로 우글거렸다. 순진한 아이는 ‘정말 거지의 자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때 아이의 이모가 웃으며 말했다. “다리는 다린데 무슨 다린지는 모르지”

어머니는 부뚜막 구석에 막걸리를 반쯤 담은 호리병을 갖다놓고 수시로 “니캉 살자 내캉 살자”라고 하며 이리저리 흔들었다. 식초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발효가 제대로 되면 밤새 주둥이를 막아놓았던 나무마개가 튀어 달아나기도 했다.

들에서 음식을 먹을 때는 밥 한 숟갈을 떠서 “고시네이”라고 하면서 논으로 던졌다. 방향을 달리하며 두세 번 했다. 식사 전에 먼저 농사 잘 되게 하는 신에게 축복을 비는 행위였다. 아이가 감기몸살을 해서 몸이 불덩이 같이 뜨거우면 부엌칼 끝이 입안을 향하게 하고는 찬물을 칼자루 쪽에서 조금씩 흘려보내서 마시게 했다. 그리고는 방문을 열고 마당을 향해 부엌칼을 냅다 던졌다. 칼이 마당 복판에 꽂히면 더 없이 좋고 안 되면 주어서 꽂은 후 그 위에 바가지를 덮어두었다. 칼을 던지고 남을 물을 마당에 뿌릴 때도 주문은 “고시네이”였다. 객귀(客鬼)가 물러가면 낫는다고 믿었다.

옛날 어느 집에 술주정뱅이 한 사람이 살았는데, 하도 술을 좋아해서 깊은 술 단지 속에 들여놓고 뚜껑을 닫은 후, 삼 년 만에 꺼내보니 딸기코 얼굴로 “안주 달라”하더란다. “술 단지에 가둬놓고 삼 년 만에 꺼내보니 안주 주소, 안주 주소”

얼굴이 시커먼 사람을 보고는 “고래전 국개(진흙) 말띠기(말뚝) 같다”라고 했다. 진흙 뻘(펄)이 깊어서 거기 들어갔다 나오면 검은 흙이 묻어 사해(死海) 머드 팩(mud pack) 한 것 같았다. 마을의 남서쪽 논 고래전은 늘 질퍽해서 깊은 데는 무릎까지 빠졌다.

존댓말로 물음은 ‘~교’였다. ‘가요?’에서 온 말이다. 길 가다가 어른은 만나면 “어디 가시능교?” 아니면 “아침 잡샀능교? 점심때면 “점심 잡샀능교?”였다. ‘했느냐?’는 “했능교?”였다. 거기에 대해 즉답을 하는 경우는 드물고 “그래, 너도 밥 먹었나?” 정도였다.

농사일을 하다가도 꽃단장하고 나서면 모두가 멋쟁이였다. 정재용 기자
농사일을 하다가도 꽃단장하고 나서면 모두가 멋쟁이였다. 정재용 기자

옷이 헐렁하고 크면 “병아리 우장 쓴 것 같다”였고 바지가 작아서 다리에 딱 붙으면 “홀떼기 같다”라고 했다. ‘호드기’에서 온 말이다. 어른들은 핫바지를 입고 젊은 청춘 남여들 사이에는 판탈롱, 나팔바지, 맘보바지, 쫄대바지가 유행했다.

“떡 냄새 난다”라는 말이 있었다. 마을에 초상이 나면 초상집은 떡을 했고 마을 사람들은 떡을 먹을 수 있는 날이었다. “귀신 듣는데 떡 말 말라” 속담도 같은 맥락이다. 치매를 당시는 노망(老妄)이라고 불렀다. “철들자 노망난다”는 ‘인간 값에 못 가는 사람’을 두고 한 말이었다. 결혼을 “국수 먹는다”고 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마을 경조사에 부조는 대부분이 음식이었다. 가까운 친척만 현금으로 했다.

쓸 데 없는 말을 하면 “씰~데 없는 소리”,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 “황새 고디(고둥) 까먹는 소리” 등으로 일축했다. 논에 우렁이가 많아 황새, 백로, 왜가리 따위의 새들이 몰려들어 잡아먹었다. 이때 부리로 껍질 깨는 소리를 “딱딱, 딱딱” 냈다. 황새가 많아 안강북부국민학교 근처 동네는 ‘황새마을’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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