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가 익어가는 소만(小滿)
보리가 익어가는 소만(小滿)
  • 정신교 기자
  • 승인 2021.05.2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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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하(立夏)와 망종(芒種) 사이의 8번 째 절기, 5월 21일(신축년)
영일만 보리밭(포항시 호미곶 구만리). 정신교 기자
신축년 소만 무렵의 호미곶 보리밭(포항시 호미곶면 구만리). 정신교 기자

소만(小滿)은 입하(立夏)와 망종(芒種) 사이의 여덟번 째 절기이며, 햇볕이 좋아 만물이 성장하면서 조금씩(小) 채워진다(滿)는 뜻이다.

올해는 5월 21일에 들었다.

산과 들에 신록이 우거지고 푸르던 보리 이삭이 누렇게 익어가면서, 여름으로 들어서는 절기다. 모내기를 비롯하여 한창 바쁜 농사철이다.

보리.

너는 차가운 땅 속에서 온 겨울을 자라왔다.

- 중략-

지금, 어둡고 찬 눈 밑에서도, 너, 보리는 장미꽃 향내를 풍겨 오는 그윽한 6월의 훈풍과, 노고지리 우짖는 새파란 하늘과, 산 밑을 훤히 비추어 주는 태양을 꿈꾸면서, 오로지 기다림과 희망 속에서 아무 말이 없이 참고 견디어 왔으며, 5월의 맑은 하늘 아래서 아직도 쌀쌀한 바람에 자라고 있었다.

- 중략 -

어느덧 갯가에 서 있는 수양버들이 그의 그늘을 시내 속에 깊게 드리우고, 나비들과 꿀벌들이 들과 산 위를 넘나들고, 뜰 안에 장미들이 그 무르익은 향기를 솜같이 부드러운 바람에 풍겨 보낼 때면, 너, 보리는 고요히 머리를 숙이기 시작한다.

- 중략-

보리, 너는 항상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탄생100주년기념 한흑구문학선집(2009)

수필 ‘보리’는 시적 어감과 운율이 뛰어난 한흑구 선생의 대표작으로, 1955년에 동아일보에 처음 발표되었으며 중등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다.

한흑구(韓黑鷗, 1909~1979) 선생은 평양이 고향으로 본명은 세광(世光)이다. 보성전문학교와 시카고노스파크 대학 등에서 수학했으며, 미 군정 통역관으로 포항에 처음 부임했다. 이후 포항수산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시와 소설, 평론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을 발표하면서 왕성한 문예 활동을 했다.

한흑구 선생 문학관(포항시 호미곶면 구만리). 정신교 기자
한흑구 선생 문학관(포항시 호미곶면 구만리). 정신교 기자

춘강(春江) 빈남수(賓南洙,1927∼2003) 박사, 아동문학가 손춘익(孫春翼, 1940∼2000) 선생과 함께 포항문인협회(한국문인협회 포항지부)를 결성하여 지역 문학과 예술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선생이 수필 ‘보리’를 쓸 무렵의 포항은 작은 어항이었으며, 영일만 일대는 온통 보리밭이었다. 보리와 농부의 삶을 통해서 그는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는 한민족의 밝은 미래를 제시하고자 했다.

태평양을 건너온 검갈매기(黑鷗)는 그의 꿈을 이곳 영일만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수평선 저 너머로 돌아갔다.

보리(菩提)….

호미곶 앞바다 전경. 정신교 기자
호미곶 앞바다 전경. 정신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