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봄을 찾아 길을 나선다. 산동마을의 산수유 축제를 거쳐 최종목적지는 지리산 화엄사 홍매화다. 몇몇 지인들과 나서는 새벽이 캄캄하다. 날이 밝으려면 2시간은 족히 있어야 하지만 번잡한 시간대를 피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단지 걱정되는 부분은 화엄사다. 12시경 도착, 산채비빔밥으로 점심을 때운 후 일주문을 통과하는 즉시 정체다. 족히 1.5Km는 되어 보인다. 옛날과는 달리 서두르는 사람은 물론 짜증내는 사람이 보이질 않는다. 그저 차분하게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이 보기 좋다.
기복사상((祈福思想:복을 비는 마음)으로 가족의 평안을 빌려는 인파인지 초파일을 맞아 등을 달려는 불자인지 끊임없는 행렬이 이어진다. 우리도 인파에 묻혀 길을 재촉한 끝에 각황전(국보 제67호로써 대웅전과 함께 화엄사의 주불전이며 정면 7칸, 측면 5칸의 다포계 중층 건물이다)을 마주하고 섰다. 각황전의 옛 이름은 장육전이며 각황전이라 개칭된 때에는 특별한 전설이 있다. 그 전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화엄사를 중창한 이는 벽암대사이다. 중창도중 입적을 예상한 벽암은 장육전 중창을 위해 화주승을 선임한다. 이 방법이 묘해서 화엄사 내의 모든 스님을 불러 모은 뒤 물 한 대야와 밀가루 한 부대를 놓은 후 물을 묻힌 손에 밀가루를 묻히는 것이다. 그때 모든 스님의 손에 밀가루가 묻었지만 유독 계파스님만은 밀가루가 묻지 않았다. 이에 계파스님이 화주승으로 내정 되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가사와 장삼, 발우 등 당장 생활에 필요한 일용품들이 전부다. 막대한 재물이 소용되는 장육전의 재건 앞에 막막한 계파스님은 법당에서 불경만 욀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까무룩 잠이든 순간 문수보살님의 계시를 받은 계파스님이 새벽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날 새벽길에서 처음 만난 사람을 붙잡고 장육전 중창을 간절히 부탁하는 계파스님이다. 비는 사람도 부탁을 받는 사람도 딱하기가 한량없고 대책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공양간서 누룽지로 연명을 하던 늙은 노파는 얼떨결에 승낙을 하고보니 더 답답하다. 생각 끝에 노파는 절벽에 올라 “문수보살님이여 이 몸이 죽어 궁중에 태어나 장육전을 재건 할 수 있게 굽어 살피소서”외친 뒤 뛰어내려 자연으로 돌아간다. 이 사건으로 계파스님은 살인자로 몰려 옥사를 치르는 등 우여곡절 끝에 궁중으로 흘러들게 된다.
당시 궁중에는 어린공주가 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태어날 때부터 오른손을 꽉 쥔 채 펴질 않는 것이다. 임금과 왕비, 후궁과 나인들이 제각각 나서서 어르고 달래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혹시 고질병이 아닌가 싶어 어의가 온갖 명약으로 치료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 공주가 계파를 만나자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쪼르르 달려가 품에 안기더니 굳게 쥐었던 손을 펴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장육전(丈六殿)이란 세 글자가 또렷이 적혀 있는 것이다. 이에 숙종대왕은 억불숭유 정책임에도 불구하고 장육전 중창의 비용일체를 부담하였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현재의 각황전(임금님을 깨닫게 했다는 뜻)이 중창을 보게 된다.
그 옆으로 특별한 매화나무가 있다. 재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나는 매화다. 마중지봉(麻中之蓬:삼밭에 나는 쑥)을 보는 듯 매화나무(천연기념물 제485호, 2007년 10월 8일 지정)가 제법 곧다. 수령 약 450여 년에 이르는 이 매화나무는 원래 4구루였으나 세 그루는 죽었다고 한다. 여느 매화보다 꽃은 작지만 향기가 진한 것이 특징이다. 보통의 매화처럼 꺾어진 듯 구부러지고 휘어진 모습이 수묵화를 닮은 듯 아기자기하면 좋으련만 육중한 전각들 속에서 햇볕을 받고자 키가 껑충하여 약 9m정도다. 따라서 그 진하다는 매향을 느끼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멀리서보면 붉은 색깔이 너무 짙어 검붉다보니 뭇사람들은 흑매화(黑梅花)또는 줄여서 흑매(黑梅)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금이 이 매화를 보는 제철이다. 어둠 속에서 지리산을 힘겹게 넘은 햇살을 받아 오둠지부터 서서히 깨어나는 매화의 붉은 자태는 가히 환상적이다. 이런 까닭에 새벽부터 전국의 수많은 사진작가와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를 늘 묵묵히 지켜보는 매화의 심정은 어떨까? 오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화를 찾고 사진을 촬영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너무 잘나서, 너무 예쁘게 생겨서 겪는 고단함이다. 그래서 그런지 2년 전에 비해 수세가 전만 못해 보인다. 풍성했던 꽃들 사이로 듬성듬성 바람이 통하는 듯 싶다. 사람들이 내품는 열기와 시멘트를 연상케 하는 축대들이 늘 심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도 매화는 여전히 꽃을 피우고 있다. 그것이 자신을 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내하는 것이다. 봄이면 척박한 땅속에서 물을 끌어올려 자신을 다독이는 것이다. 꽃을 피워야 한다고, 봄이 왔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코끼리가 하늘과 지상의 사자 역할을 한다면 각황전 옆 홍매화는 봄의 전령사다. 늘 요란함 속에서도 새벽녘 도량석(道場釋: 불교 사찰에서 새벽 예불 전에 도량을 청정하게 하기 위하여 행하는 의식)을 복습하며 증진하는 것이다. 서유기를 빌어 전설 속의 생물이었다면 득도를 했을 경지에 이른 것이다. 각황전과 대웅전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향내가 좋고 스님의 목탁소리에 더욱 낭랑해진 염불을 읊조려 흉내하는 등 심신을 가다듬어 온 것이다. 앞으로 천년을 살아도 인내하고 견딜 수 있는 힘을 축적 중인 것이다. 바람이 일어나자 머리가 어질하다. 그간 감추었던 향기를 한꺼번에 내뿜은 모양이다.
그렇다고 꼭 질서정연 하지만은 않다. 어떤 방향에서 보면 헝클어진 머릿결 같아 보인다. 인간 세상의 한 단면을 보는 느낌이다. 또 자세히 보면 헝클어진 가운데에서도 질서가 보인다. 조금씩 양보하며 만들어낸 결과물인 것이다. 어머니의 바느질이 신기해서 반짇고리를 엎질러 난장판을 만든 실타래의 뭉치가 아니다. 얼키설키 역인 모습이 무질서해 보이지만 하나하나 풀어보니 금방 길이 보이고 가지가지가 떨어진다. 한옥을 짓는 목수가 못을 사용치 않고 결구의 기술로써 목재를 다루는 솜씨를 닮았다. 그 사이사이에 점점이 들어앉은 매화꽃이 더욱 화려하여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언제까지 목석이 되고 싶지만 역시 인간은 인간인 모양이다. 촌각의 시간에 스스로를 깨워 무리에 휩쓸리고 이내 발걸음을 옮긴다.
나오기 전 새삼 올려다보는 매화나무의 자태가 꿋꿋하여 늠름하다. 시류에 파묻혀 얄팍한 귀를 가진 나와는 너무 대조적이다. 무엇을 듣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간간히 청맹과니가 되었으면 좋으련만 이리 기웃 저리 기웃 안절부절 못하는 삶이다. 어디 그것뿐이라 그는 늘 이렇게 조용하고 늠름한 모습으로 상선약수처럼 오가는 세월을 보내건만 부질없는 이내 몸만 유난히 바쁜 모양이다. 산문을 들어서자 만난 귀머거리 삼년, 봉사 삼년, 벙어리 삼년을 표현한 석상이 새삼 눈에 밟힌다.
총총 걸음으로 산문을 나서는데 “아저씨 여기 매화나무가 유명하다는 데 어디 있나요”묻는다. “천천히 각황전으로 가보세요”라고 하자
“각황전 말고요 매화나무요”하고 퉁명스럽게 또 묻는다.
“예 그저 천천히 올라 각황전에 가면 자연히 보일 겁니다”고 하자 이번에는 “많이 걸어야 되요”묻는다. 나보다 더 바쁜 모양이다. 서두르는 폼이 곧장 매화나무를 보고 돌아설 모양이다. 불교라는 종교를 떠나서 역사가 숨 쉬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걸 돌아보며 배우고 즐길 마음과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이다.
“숨 몇 번에 천천히 오르면 금방 갑니다”하자 웬 선문답이냐는 듯 퉁명스럽게 돌아보고는 길을 재촉이다. 삶이 왜 이리 바쁜질 모르겠다. 그래봤자 매화도 나도 하루하루가 같고 일년이 같고 백년이 같을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