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어날 추억] ㊶ '새마'의 공동우물 변천 과정의 역사
[꽃 피어날 추억] ㊶ '새마'의 공동우물 변천 과정의 역사
  • 유병길 기자
  • 승인 2021.12.01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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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재 같은 향나무 옆에는 마을의 생명줄인 공동우물이 있다.
집집마다 펌프를 박고 간이 상수도를 설치하면서
공동우물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새마 마을앞의 향나무. 유병길 기자
새마 마을앞의 향나무. 유병길 기자

1950년~60년대 봉강리(경북 상주시 외서면) '새마' 앞을 지나다 보면 나지막하고 둥글게 손질한 큰 분재 같은 향나무를 볼 수 있었다. 향나무를 처음 본 사람들은 감탄하였다. 1950년대 후반 서울 있다는 사람이 사고 싶어하였지만, 동네에서 팔지 않았다. 백 년 이백 년이 되었는지? 이 향나무의 나이를 아는 사람은 없다. 수백 년 된 향나무 밑의 공동우물!

공동우물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두 길로 갈라지는 곳의 넓은 공터에 중앙에 연자방아가 있었다. 연자 방아채에 소를 연결하여 소를 몰아 둥근 돌 바퀴를 돌리며 여름에는 보리를 찧고 가을 추수가 끝나면 벼를 찧었다.

연자방아는 소의 힘을 이용 둥근돌을 돌려 벼 보리 방아를 찧었다. 유병길 기자
연자방아는 소의 힘을 이용 둥근 돌을 돌려 벼 보리 방아를 찧었다. 유병길 기자

기말기에 정미소가 생기면서 연자방아도 일이 없어 쉬고 있어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연자방아 위에 올라가서 놀다가 가운데 기둥과 방아채 사이에 손가락이 들어갔는데, 같이 놀던 친구가 방아채를 눌러서 손톱이 빠지는 사고도 있었다. 사고 후에 손가락 손톱이 겹쳐서 나오고 있었다. 한두 해 지날수록 연자방아는 쓸모가 없어 둥근 돌로 방치되었다. 1960년대 후반 대구 있는 분이 정원석으로 사가고 흔적조차 없어졌다.

'새마'의 3개의 우물 중에 향나무 밑 공동우물의 물맛이 제일 좋았고 물이 많이 났다. 공동우물은 이른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여인들의 발길이 계속 이어졌다.

공동우물에서 물을 퍼올리던 두레박. 유병길 기자
공동우물에서 물을 퍼올리던 두레박. 유병길 기자

물을 푸려고 두레박을 우물에 던질 때 요령있게 던지면 두레박이 물속에 풍덩 들어가는데, 들어가지 않으면 줄을 이리저리 당겨 물속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두 손으로 두레박줄을 당겨 물을 올려 항아리에 붓고 다시 퍼 올려 항아리 가득하면 두레박을 놓거나 뒷사람한테 주었다. 두레박줄은 언제나 젖어있어 겨울에는 얼어서 뻣뻣했다. 손 시린 줄도 모르는 여인들의 손길에서 녹았다.

머리에 따베이를 얹고 물항아리를 머리에 올려 집으로 이고 왔다. 유병길 기자
머리에 똬리를 얹고 물항아리를 머리에 올려 집으로 이고 왔다. 유병길 기자

향나무 위에 올려놓았던 똬리를 머리에 올리며 달린 줄을 입에 물었다. 두 손으로 항아리를 힘겹게 들어서 머리에 이고 와서 부엌의 큰 물독에 부었다. 아무리 춥거나 더워도 하루 먹을 물을 이고 와서 물독에 가득 채웠다. 밥 짓고, 숭늉과 국도 끓이고,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삶고, 냉수로 마시는 생활용수가 되었다.

두레박은 같이 사용하였으나, 6.25사변 이후에는 미군이 먹고버린 분유 깡통으로 개인이 두레박을 만들어 물을 퍼 올리고 줄을 사려서 향나무 위에 올려놓았다. 밤에 보면 향나무는 두레박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우물물을 퍼 올려서 빨랫방망이로 탕탕 두드리고 치대며 빨래를 하였고, 여름에는 들에서 오다가 아이들 등목도 시켰다. 만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동네에서 일어나는 좋은 소식, 나쁜 소식이 빠르게 알려지고 소문의 진원지가 되었다.

양쪽 물통에 물을 가득 담아 물지게로 지고 왔었다. 유병길 기자
양쪽 물통에 물을 가득 담아 물지게로 지고 왔었다. 유병길 기자

1950년대 후반에 총각들이 함석 물통에 물을 퍼서 물지게에 지고 다니면서  금남의 구역이 남녀 공용으로 바뀌었다. 옆집의 처녀가 항아리를 이고 우물로 가면 마음에 두고 있는 총각은 물지게를 지고 우물로 가서 말을 걸었고 연정도 키워갔었다.

정 씨 아저씨 집 안에 설치된 펌프를 보고 부러워들 했지만, 돈이 없어 설치를 못 했다. 동네에서 두 번째로 친구 갑이 집에서 펌프를 박는 것을 구경하였다. 우물을 파고 설치하는 게 아니라, 파이프 밑 부분 1m 정도에 구멍이 여러 개 있고 끝이 뾰쪽한 긴 쇠 파이프에 고정 장치하고 손잡이가 달린 쇠뭉치를 끼워 똑바로 세워서 여럿이 잡았다. 쇠뭉치를 들어 올렸다가 ‘탕’‘탕’ 놓아서 파이프를 땅에 박았고, 고정 장치를 다시 올리며 계속 박아 2m를 박고, 다른 파이프를 연결 용접을 하여 다시 ‘탕’‘탕’ 놓으며 4m 박았다. 파이프 속에 작은 돌을 넣으니 첨벙 물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파이프에 손잡이가 달린 펌프를 연결하였다. 손잡이를 올리고 펌프 속에 마중물을 붓고 손잡이를 내렸다 올렸다를 계속하여 반복하니 모래가 섞인 황토물이 '콸''콸' 나왔다. 구경하든 사람들이 ‘야’ 소리를 질렀다.

며칠 동안은 계속 퍼 올려도 흐린 물이 나왔다. 30여 일 후에 맑은 물이 나왔는데, 흰 사기그릇에 받아보면 가는 모래가 바닥에 있었다. 2개월 정도 지나니까 깨끗한 물만 올라왔고 물맛도 향나무 밑 공동우물 맛과 같았다.

땅속의 물을 퍼올려 사용하였던 펌프. 유병길 기자
땅속의 물을 퍼올려 사용하였던 펌프. 유병길 기자

공동우물은 2년에 한 번씩 물을 퍼내면서 우물 속 청소를 하였다. 청소할 때 친구 갑이 집 펌프에도 흙물이 올라와서 같은 수맥인 줄 알았다. 집안에 설치된 펌프의 편리함을 보고 동네에 펌프 설치 붐이 일어 1960년대 집집마다 펌프를 설치하였다. 두레박, 물지게, 따베이 등이 사라졌다.

공동우물을 사용하는 사람이 없으니 아이들한테 위험하여 뚜껑을 덮어 두었다. 가뭄이 심하여 벼 논에 물을 양수할 때는 뚜껑을 열고 양수기 호스를 우물 속에 넣어 물을 펐다. 비료를 주거나 농약 한 번 뿌려주지 않아도 봄이면 싱싱한 새순을 뻗어내는 향나무와 폐허가 된 공동우물.

1900년대 후반 마을 하수로를 설치하였으나, 관 연결부위 부실로 우사에서 나오는 오수가 지하수로 흘러들어 펌프 물을 못마시게되었다. '새마'의 젊은 지도자들 노력으로 2000년대 초 상주시의 보조를 받아 마을 뒤 절터골 입구에 지하 암반  120m을 뚫어 간이 상수도를 설치하였다. 하수관 연결공사도 완벽하게 하였다. 집집마다 주방 욕실에서 간이 상수도물을 펑펑 쓰게되어 편한 삶을 살게 되었다. 어려운 시절 설치하여 편리하였던 펌프도 철거되면서 고철로 팔려나갔다. 상주시 상수도 배관공사는 집집마다 대문 안까지 묻어 놓았다. 간이상수도 계랑기와 배관 연결공사를 하면 2023년에는  봉강리도 깨끗한 상주시 상수도물을 마시게 될것이다. 

수백 년 전부터 '새마'에서 일어났던 즐거웠고 슬펐던 모든 일들을 향나무와 공동우물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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