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㊼오막살이 집 한 채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㊼오막살이 집 한 채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1.05.11 17:0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논 한 뼘이라도 넓히려니 집터는 작아질 수밖에
날이 저물면 모두 제집이라고 찾아들어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에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사울 왕에 이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예루살렘 성전에 제비와 참새가 날아드는 것을 보고 감격하여 노래를 불렀다.

소평마을에도 참새와 제비가 많았다. 농사는 봄비가 내리면서부터 시작됐다. 봄비는 얼었던 땅을 녹이고 농부들은 소를 몰아 논을 갈았다. 강남 갔던 제비는 돌아 와 처마 밑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기록을 보니 마을에 제비가 날아든 날짜는 1964년은 5월 13일, 1966년은 4월 28일이었다.

집은 부부 제비가 함께 지었다. 흙과 지푸라기를 섞어 한 줄씩 쌓아올렸다. 작은 입으로 흙을 물어다가 온몸을 바르르 떨며 갖다 붙였다. 많은 농부들은 가을을 지나 제비가 떠나간 뒤에도 제비집을 허물지 않고 그냥 두었는데, 새봄이 되어 돌아온 제비는 헌집을 약간 보수하여 그냥 살았다. 작년에 살던 제비가 제집으로 찾아온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제비는 수다쟁이였다. 아침마다 십여 마리가 빨랫줄에 늘어 앉아 조잘거렸다. 초가지붕의 구멍을 빠져나온 참새는 빨랫줄을 제비에게 내 주고 감나무 가지로 날아가 앉았다. 서로 언어가 달라 소통은 안 되는 것 같았다.

지난 5월 5일 창말 쪽에서 본 안강 들판, 멀리 양동산이 보인다. 옛날에는 소가 끄는 쟁기를 이용하여 논을 갈았으나 지금은 트랙터로 한다. 정재용 기자
지난 5월 5일 창말 쪽에서 본 안강 들판, 멀리 양동산이 보인다. 옛날에는 소가 끄는 쟁기를 이용하여 논을 갈았으나 지금은 트랙터로 한다. 정재용 기자

소평마을은 참새와 제비가 살아가기에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들판 한가운데 있다 보니 제비는 진흙이 많아 집짓기 좋고 벌레가 많아 먹이 걱정이 없었다. 참새는 잡식성이었다. 나락(익어가거나 익은 벼를 그렇게 불렀다)이 여물기까지는 벌레를 잡아먹다가 익으면 이삭을 훑어서 까먹었다. 마을의 대부분이 초가집이었다. 참새는 남쪽으로 향한 지붕 깊숙이 파고들어 깃털을 뽑아 침실을 마련하고 겨울을 났다.

종달새는 넓디넓게 펼쳐져 있는 보리밭에 신이 났다. 비를 맞은 보리는 나날이 짙은 초록으로 싱싱해져가고 종달새는 하늘 높이 솟구쳐 활발하게 노래를 불렀다. 짝을 찾는 소리였다. 빨리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아야 보리 베기가 시작되기 전에 둥지를 떠날 수 있었다. 가끔 창공에 솔개가 뜨면 마당의 암탉은 “꾹꾹, 꾹꾹” 다급한 소리로 병아리를 불러 모아 날갯죽지 속에 숨기고 하늘을 날던 종달새와 참새는 입을 다물고 보리밭으로 급강하 했다.

농부에게는 집보다 논이 우선이었다. 논을 한 뼘이라도 더 넓히려다보니 집터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좁은 구릉(丘陵) 지대에 이마를 맞대고 앉은 집들은 비를 피해 좁은 텐트 안에 쪼그려 앉은 사람들 같고, 길을 따라 다닥다닥 붙은 모양이 박태기나무에 꽃망울 같았다. 집터는 전체적으로 어래산 줄기가 뻗어 내리는 자락이다 보니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았다.

마을의 남쪽에는 고래전 샘터에서 내려오는 앞도랑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동쪽은 제법 높은 비탈이었다. 비탈 아래는 기계천 봇물이 1호 수문을 닫았을 때 흐르는 도랑이 북에서 남으로 나 있었다. 수문을 열면 그 물은 큰거랑을 지나 형산강으로 흘러들었다. 북쪽에도 황새마을에서 흘러드는 물이 농수로를 타고 마을 동쪽 도랑으로 합류하게 돼 있었다. 큰비가 내리면 물길은 앙코르와트의 해자(垓字)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마을의 서쪽은 계단식 논으로 물꼬를 타고 여러 개의 작은 폭포를 이뤘다.

마을에 쉴 만한 공터 하나 없고 뙤약볕에 나무그늘 지어 줄 커다란 느티나무나 팽나무 한 그루 없었다. 다만 마을 복판에 봉분 3기가 있어 어쩔 수 없이 비워놓은 묘 터가 있었는데 후손이 끊긴 탓으로 이곳은 아이들의 놀이터로 변해 있었다. 이 공간을 ‘미뿌랑’이라고 불렀다.

집을 지으려면 자연히 서쪽에 지을 수밖에 없었다. 1960년 10월 10일 학봉댁이 천북 신당에서 소평마을로 이사를 와서 그 이듬해 중동댁 논에 집을 지었다. 1966년 4월 15일에는 서동댁이 학봉댁 집 앞에 벽돌 600장으로 3칸 집을 짓기 시작하여 4월 19일 알매를 쳤다. 담을 쌓는 일은 학봉댁 몫이라는 결론이 내렸다. 이렇게 해서 소평마을은 쉰 호가 완성되고 이후로는 이사 가고 들어오고는 했으나 새 집을 짓는 일은 없었다.

1966년 4월 30일 마을 앞 미나리꽝을 메워서 마을 진입로를 넓혔다. 마을에 기와집은 예배당을 비롯하여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고 전부 초가집이었다. 다섯 식구가 부엌 하나에 단칸방에 살아가는 집도 있었다. 그래도 다리 뻗고 잘 수 있는 내 집이었다. 명절이면 때때옷 입고 여름날 저녁에는 수제비 한 그릇에 웃음소리가 담을 넘었다.

지난 4월 28일 아폴로 11호 사령선의 조종을 맡았던 마이클 콜린스(91)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69년 7월 21일(한국시각)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과 함께 인류 최초의 달 착륙을 성공시킨 인물이다. 암스트롱과 올드린이 달 표면에 내려 임무를 수행할 때 그는 사령선에 머물며 달 궤도를 돌았다. 지구로 돌아와서 그는 “지구가 너무 연약해 보였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착륙선 ‘이글’이 착륙에 성공하자 급히 이날을 임시공휴일로 선포하고 아이들은 등교 안 해도 된다는 기쁨에 환호성을 질렀다.

세상의 이목을 한 몸에 받았던 우주인도 달에서 돌아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듯 소평마을 사람도 아무리 누추해도 돌아가 몸과 마음을 편히 쉴 데는 오직 한 곳 자기 집뿐이었다. 버스가 다니지 않아 장에 갔다가는 뙤약볕 오리(五里) 길을 예사로 걷고, 눈보라치는 겨울에도 읍내 정류소에서 내려 논둑길을 걸었다. 집안 혼사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캄캄한 어둠을 뚫고 사랑하는 가족이 호롱불 안 끄고 애타게 기다릴 것을 생각하며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었다.

황분조 씨가 반찬거리를 준비하고 있다. 몸빼 차림은 60, 70년대 농촌 여성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안방에 모로 세워져 있는 호마이카 밥상과 창호지 일부를 잘라내고 유리판을 붙인 문이 이채롭다. 정재용 기자
황분조 씨가 반찬거리를 준비하고 있다. 몸빼 차림은 60, 70년대 농촌 여성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안방에 모로 세워져 있는 호마이카 밥상과 창호지 일부를 잘라내고 유리판을 붙인 문이 이채롭다. 정재용 기자

농부들의 ‘우리 집’은 농부네 식구들만의 집이 아니었다. 집에는 온갖 가축들이 자신들의 집으로 함께 살고 있었다. 개는 마루 밑에 놓인 판자 상자에 들어가 있다가 낯선 사람이 오면 컹컹 짖어대고, 닭은 잿간의 횃대에 올라가 잠을 자고나서 날이 새면 내려와 두엄을 헤집고, 소는 가만히 둬도 알아서 외양간으로 걸어 들어가고, 토끼는 토끼장에서 맘 놓고 사랑을 했다.

미물도 슬그머니 들어와 더부살이를 했다. 굼벵이는 썩은 지붕 속에서 뒹굴고 쥐는 헛간 담벼락 밑에 구멍을 뚫어 들락거렸다. 거미는 처마에 줄을 쳐서 불빛을 보고 날아드는 하루살이를 사냥하고, 개미떼는 축담 돌 틈으로 먹이를 물어다 나르고, 지렁이 두엄 속에 있다가 비 오는 날이면 마당으로 기어 나왔다. 짚으로 엮은 둥우리 속의 곰박사이(닭 진드기)는 오매불망 암탉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6월 중순 농번기로 접어들면서 농부는 대부분의 시간을 들판에서 보냈다. 가뜩이나 하지(夏至)를 앞두고 낮이 긴데 농부는 새벽 일찍 들판으로 나가 어둠살이 낄 때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저녁상을 물리자마자 곤드라졌다. 집은 베이스캠프가 되어 이들을 포근히 감싸줬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