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같은 큰형수
엄마 같은 큰형수
  • 유무근 기자
  • 승인 2021.05.04 10:0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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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살에 시집와 소처럼 일만 한 형수
형수 젖동냥하며 자란 시동생 이야기

 

필자의 큰형수 박순한(93) v자를 그리며 행복을 전하고 있다  유무근 기자

 

세상 법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착한 큰형수는 반 문맹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 군인들이 미혼 처녀들을 일본으로 강제로 데려가는 처녀 공출이 두려워 출가부터 서둘렀다고 한다.

큰형수 하면 떠오르는 나의 영감은, 소처럼 일만 하는 늘 손빨래하고 부엌 가마솥 주변에서 불 지피는 모습이 연상된다. 

흰 수건 머리에 동여매고 아가야~ 부르면 쏜살같이 나타나는 유비무환(有備無患) 시어머니의 분신이다. 

또래 시누이도 있고 시동생이 5명이나 있다.

큰형님은 최고 학벌에 국가 정보 계통 엘리트 직장인이다. 아버지는 부업으로 사채업도 하는 소위 부잣집이기도 했다. 천석꾼 집이라 먼 친인척들 손님들까지 내 왕도 많고, 열다섯 식구 살림하랴 청양고추 같은 시어머니 시중들세라 큰형수 손등에 물 마를 새 없었다.

◆며느리와 비슷한 시기에 임신하고 출산하다.

11남매를 두고 어머니가 원하지 않았던 막내인 필자를 출산했다.

당시는 평균수명이 짧아서 여자 나이 50이면 할머니 행세를 했던 시대였다. 긴 대 담뱃대 물고 놋쇠 재떨이에 재 뜨는 소리는 상당한 위엄이 있기도 했다.

어머니는 43세에 며느리와 같이 임산부가 되어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고 한다. 외부인이 알까 봐 보호대를 졸라매고 다녔다. 낙태 하려고 언덕에서 뛰어 내리기도 하고 막걸리도 마시고 해보았지만 모두다 실패했다. 

이듬해 늦은 봄 44세에 막내를 출산하는 날, 갑자기 진통이 와서 2주나 빠르게 조기 출산되었다. 막내가 큰조카보다 백여 일 늦게 출생했다.

체중 미달 미숙아 수준이라고 했다.

참외만 한 크기라고 한다.

* 출산 때 고부간의 대화이다.

형수: “어머니 아들입니다. 그런데 너무 작습니다~!”

엄마: “어디 보자꾸나. ---”

형수: “어머니 하도 작아서 우는소리도 쥐 소리 같습니다. 사람 되겠습니까?”

이튿날 새벽 형수가 큰방에 들어왔다.

형수: “어머니 안 죽었습니다!! 얄궂어라”

엄마: “얼른 아랫목으로 내려오너라. 배고프겠다.”

노산(老産)으로 조리도 안 했는데 모유 나올 리는 없었다.

이날부터 막내는 엄마 젖이 부족하면 형수 젖을 일 년 가까이 동냥해 먹었다고 한다. 가관인 것은 마주 보며 젖을 빠는 젖 주인인 조카를 시샘하여 발로 차 밀어내어 독식하려는 욕심 본능이 자주 발생하기도 했단다.

◆동서들의 반란, 위계질서 무너지다.

형님들께서 결혼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혼주석은 큰형수가 대신했다. 막내가 그랬었고 작은 형님도 그랬었다. 시어머니를 대신한 특별한 자리이다.

새 며느리 새 식구가 들어오고 화합하고 행복해야 할 집안에 균열이 생기는 조짐이 보였다. 세대차이랄까 학벌 차이로 상명 불복종 소위 동서의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배웠다 하는 한 며느리가, 수준 차이 불통 핑계로 수십 년간 이어진 항명 파동으로 한 집안의 맏며느리 위계질서는 무너지고 만다.

덕(德)만으로는 위엄이 서지 않았다. 무학(無學)과 무식(無識)은 다르다. 무학은 부모의 잘못이지 나의 죄는 아니다. 남편을 원망해야 할지 시대를 탓해야 할지 심성이 착한 나 자신을 원망해야 하는지 망설임과 인내로 호되게 꾸짖을 기력마저 사그라졌다.

2016년 낙상하지 않았을 때 천진난만한 큰 형수 모습  유무근 기자

◆큰형수의 됨됨이를 엿보다.

큰형수는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맏며느리로서의 소임을 다하신 법 없이도 사시는 순종형이시다. 신위를 모신 별채 빈소에 당신 혼자 삼베 옷 갖추어 입고 사십구재가 지나고, 한 해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따뜻한 밥 지어 곡하며 망자에게 상석을 올리던 형수님이었다. 시동생들이 여럿 있었으나 큰형수의 구성진 울음소리에 동요되어 눈물을 흘렸지만 쑥스러워서 한 번도 참여해보지 못했다.

무능한 장자의 성적은 망조를 일으키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가세(家勢)가 기울어져 집안이 망해버렸다.

장자 상속 시대에 제사 지내고 동생들에게 부모 역할 한다는 기대 풍습으로 아버지는 전 재산을 큰아들에게만 집중했다. 담보로 인수한 갖가지 부동산과 살고 있는 자택까지 경매로 쫓겨났다.

부잣집으로 인정받았던 우리 집이 큰 형님의 고삐 없는 외도와 무지막지한 졸속경영으로 부도가 났다.

그 많은 대갓집 살림살이 가재들이 마당으로 집하 되었고, 마른하늘에 내린 소낙비는 애지중지하시던 큰형수 화장대와 옷가지 함은 빗물 속에 바래버렸다. 허탈해하는 얼굴을 어린 나이임에도 읽을 수 있었다. 졸지에 이웃집 단칸방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온 가족의 행복은 멈춰버렸다. 돈을 벌어야 했다. 공납금 미납자 거명은 고정이 되다시피 했다. 방과 후 신문 배달은 기본이었다. 큰형수는 주방장으로 취업을 했다. 생계에 큰 기여가 되었다.

책임감으로 휴일도 없이 혹사당하다가 쓰러지기도 여러 번 있었다. 시장 보러 가다가 교통사고 당해 한 달 만에 깨어난 후유증도 안고 있다. 일전에 화장실서 낙상으로 골반 골절로 거동을 하지 못하는 와병 환자가 되어 있다.

◆천진난만한 93세 천사 박순한 여사

세월이 76년이 흘러 막내가 75살 큰형수 나이 93세다. 주변에 남편과 시부모 시동생들은 모두 다 고인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쫓겨온 듯 시집와서 무뚝뚝한 정 없는 남편 만나 누구처럼 그 좋은 신혼 시절 없이 임산부 되어 아들 다섯 딸 하나 연달아 낳았다.

그도 모자라 장승 같은 시동생 뒷바라지 손빨래하며,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 호통 소리 들릴세라 돌아서면 밥상 차릴 시간이라 하루가 30시간이라도 부족한 시절이었다. 그 보상 누구한테 어디서 다 받을 건가! 그 어려웠던 그때를 큰형수는 어떤 모습으로 설명해 주실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넷째 며느리(좌) 외동 딸(우)과 나들이를 즐기고 있다  유무근 기자

 

두 달 전에 동갑내기 시누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 같이 가야지 하면서 오랫동안 그렇게 슬피 우시기도 했다

내로라하는 아들들은 많지만, 형편 어려운 딸넷집이 더 좋아 거기에 계신다.

불편한 몸이나마 생존해계시어 정말 고맙고 소중하게 여겨진다.

형수 젖 은혜를 잊어버리는 배은망덕한 시동생은 아니다. 다음 세상에서라도 인연이 이어지는 바람이다.

오월 어버이날을 맞이해 불쌍하고 소같이 일만 했던 큰형수,

엄마 같은 큰형수를 가슴에 담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