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창] 대인배의 풍모, 박정희와 정주영
[인문의 창] 대인배의 풍모, 박정희와 정주영
  • 장기성 기자
  • 승인 2021.05.04 17:00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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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이 많은 게 결코 나쁜 것은 아니지만, 세상을 더 넓고 깊게 포용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바로 대인배다. 대인이 '된 사람'이라면, 소인은 '든 사람'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 개통식 테이프를 끊고있다. 매일신문DB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 개통식 테이프를 끊고있다. 매일신문DB

우리는 ‘대인(大人)’이나 ‘소인(小人)’이란 말을 이따금 듣기도하고 보기도 한다. 이 말에 접미사 ‘배(輩)’를 덧붙어 대인배 혹은 소인배라고도 불린다. 도대체 대인배와 소인배의 차이는 뭘까? 혹자는 대인이란 덕(德)이 재(才)보다 큰 사람을 뜻하며, 소인은 거꾸로 재가 덕보다 큰 사람이라 말하기도 한다. ‘덕’은 남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성품이라면, ‘재’는 총명함으로 무엇이든 잘하는 재능을 말하기도 한다.

공자(孔子)는 사람을 지자(知者)와 인자(仁者)로 나누었다. 지자가 눈치를 잘 보며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꿰뚫는 사람이라면, 인자는 모든 일을 넓고 크게 생각하는 포용적 사람이라 했다. 또 지자가 단기적이고 국지적 전술에 능하다면, 인자는 장기적이며 통합적 전략에 뛰어난 사람이라고도 했다. 공자도 ‘지자’를 소인으로, ‘인자’를 대인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논어』(論語)에 요산요수(樂山樂水)란 말이 있다. 이 말이 원래는 ‘지자요수 인자요산’(知者樂水 仁者樂山)의 준말로 ‘지자는 사리에 통달하여 막힘이 없으니 물을 좋아하고, 인자는 산(山)처럼 중후하여 변함이 없으니 산을 좋아한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대인은 누가 뭐란다고 해서 가볍게 움직이지 않으나, 소인은 귀가 얇고 줏대가 없어 시류에 잘 편승한다고도 했다. 아무튼 지자(知者)는 지자대로 인자(仁者)는 인자대로 쓸모가 있고, 대인과 소인이 서로 얽혀야 세상이 움직인다. 소인이 있어야 대인도 있고, 소인이 있어 비로소 대인이 돋보이게 되는 것이 세상의 메커니즘이 아니던가.

중국 원(元)나라의 학자 ‘증선지’(曾先之)가 지은 『고금역대십팔사략』(古今歷代十八史略)이란 책은 중국 고대사를 간추려 담은 역사서다. 이 책 가운데 ‘십팔사략’이란 부분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진(秦)나라의 어느 왕실 목장에서 말 몇 마리가 도망을 쳤다. 관청에서 행방불명된 말을 탐문 조사해 보니, 이웃 마을 농부들이 그 말들을 잡아먹은 것이 밝혀졌다. 취식한 관련자가 무려 3백 명에 이르렀다. 관아에서는 이들을 모두 잡아들여 처형하려 했다. 그러나 왕은 실종 전후의 연유를 꼼꼼히 듣자마자, “좋은 말(良馬)을 먹은 다음에, 술을 마시지 않으면 몸에 해로우니라”면서 오히려 그들에게 술을 베풀고 풀어 주었다. 왕은 가난해서 잡아먹은 그들을 딱하게 여긴 것이다. 덕이 묻어난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진나라의 왕권을 노리는 반란군이 들이닥쳤다. 진나라 궁궐은 급기야 포위되어 전멸할 위기에 처했다. 왕도 사면초가에 몰렸다. 이때 3백 명이 넘는 결사대가 나타나 왕을 구출해 냈다. 그들은 바로 얼마 전에 말을 잡아먹은 농부들이었다.

현대그룹 정주영회장 부부의 젊은 시절모습이다. 위키백과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1915-2001) 부부의 젊은 시절모습이다. 위키백과

박정웅이 쓴 『이봐, 해봤어』라는 책(2015년 간행) 앞머리에 보면 박정희와 정주영의 일화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 공사현장의 진행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당시 정주영 현대건설 사장을 청와대로 직접 불러들였다. 박대통령이 “정 사장, 지금 진행되고 있는 공구가 난공사라고 들었는데....."하고 이야기를 건네는 순간, 갑자기 하던 말을 멈추었다. 현장 작업복 차림으로 앞에 앉아 이야기를 듣던 정주영 사장이 어느새 고개를 떨구며 졸고 있었기 때문이다. 빠듯한 작업 일정으로 며칠 밤을 꼬박 새운데다가 그 동안 겹친 피로로 몰려오는 수마(睡魔)를 대책 없이 깜빡했던 것이다. 박 대통령은 그런 정 사장을 깨우지 않고 조용히 놔둔 채로 넌지시 바라보고만 있었다. 몇 십 초가 지났을까.

“아이고 이런, 각하 정말 죄송합니다!”

정 사장이 소스라치게 깨고는 당황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아니오, 정 사장! 내가 미안하오. 그렇게 고단한데 좀 더 자다 깨었으면 좋았을 것을....”

박대통령이 정 사장의 두 손을 잡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역사적인 경부고속도로 건설 사업을 두고 두 사람이 교호하며 쏟았던 열정과 집념,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관계를 잘 말해주는 일화이다. 이 일을 두고 훗날 정 회장은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박 대통령이란 분이 그 시절 얼마나 대단하고 위엄 있는 분이야. 그런데 그런 어른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도중에 깜빡 졸았어. 근데 그게 2-3분, 길어야 4분이 안 될 거야. 어찌나 맛있게 잤던지. 대통령께서는 기가 막혔을 거야. 아마 내가 태어나서 엿 새 동안 양말을 못 갈아 신었던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을 거야. 그 정도로 현장에서 허구한 날 날밤을 새우던 때였으니까. 내가 작업복을 벗어 놓고 잠을 자본 기억이 별로 없어. 나뿐만 아니라 당시 현장 사람들의 양말을 벗겨 보면 대부분 발가락 사이가 퉁퉁 불어 있을 정도였으니깐. 그런 상황에서 박 대통령께서 호출을 하셔서 불려갔다가 난처한 일이 일어난 것이지. 그때 일이 또렷이 기억에 남아서 나도 가끔 현장에서 써먹었지. 공사현장을 돌아다니다 보면 작업하다 말고 피로감에 현장에 앉아서 조는 친구들이 가끔 있거든. 얼마간 자도록 놔두고는 딴 데를 돌아보고 와서는 발로 툭 깨워. 그러면 현장 호랑이로 통하던 날 알아보고는 기절초풍을 하는 거야. 그러면 ‘내가 미안하구먼’하고 말하지. 놀라긴 했어도 그들 역시 나처럼 감격했을 거야. 하, 하, 하!”

경부고속도로 완전개통식을 신문 1면에 보도했다. 매일신문DB
경부고속도로 완전 개통식(1970.7.7)을 모든 신문이 1면 톱으로 보도했다. 불과 50년전 신문기사에 쓰인 한자가 이채롭다. 이때 박정희는 53세, 정주영은 55세였다. 매일신문DB

자주 헷갈리는 낱말 가운데 ‘지식’과 ‘지혜’라는 말이 있다. 사전에서 보면 지식은 넓게 아는 것, 지혜는 아는 것을 슬기롭게 사용하는 힘이라 쓰여 있다. 대인과 소인의 관계를 지혜와 지식에 견주어 보면, 대인이 지혜라면, 소인은 지식으로 연결될 듯하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졌다고 해도 그를 지혜롭다고 할 수는 없다. 위의 두 일화에서 보듯이 지식이 많은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은 단순한 지식인 보다는, 세상을 더 밝고 더 살맛나게 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닐까. 탈무드에 보면 “지식은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주는 것이고, 지혜는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다”이라고도 했다. 지혜가 지식보다 한 수 위에 놓여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진나라의 왕이 마을 농부들을 처형했더라면, 만리장성의 건설과 진나라는 그날로 중국역사에서 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박정희가 정주영의 졸음을 참지 못하고 질책하며 그 자리를 떴다면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어떻게 진행되었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소설가 최인호의 표현을 빌자면 대인은 ‘된 사람’이고, 소인은 ‘든 사람’이란 표현이 왠지 마음에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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