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엄마의 눈빛
그날 엄마의 눈빛
  • 유무근 기자
  • 승인 2021.05.01 17:00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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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를 돌아 60년 전 오늘을 되돌아본다.

1930년  필자 어머니 김인수씨. 유무근 기자

1961년 신축년(辛丑年) 정월 초엿새 날 축시(丑時)는 엄마가 돌아가신 날이다. 막내인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수업 시간 내내 온통 엄마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던 엄마 바라기였다. 11남매 막내로 태어나 엄마 치마폭 속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1학년까지도 학교 갔다 대문 박차고 들어와 “엄마 젖”하고 소리치면 엄마는 하던 일손 접고 젖부터 주어 생떼를 막아야 했던 별칭 대장이었다. “막내는 불쌍하다”라는 엄마의 귓전 말들을 그때는 알 리가 없었다. 아마 부모 사후에 걱정 때문일 것이다.

엄마는 한쪽 수족이 마비되어 발음도 어둔한 중풍 환자였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혈압으로 쓰러지셨다. 중풍 후유증으로 혼자서는 용변도 보기 어려웠다. 용변을 보기 위해 아무리 애를 써도 요강 위에 올라 앉지를 못하여 나의 도움이 절실하였다.

방과 후 귀가해 오면 엄마 방은 온통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소변을 참지 못해 혼자 요강하고 씨름하다 넘어져 이불과 방바닥은 한강이 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수족이 마비되어 죽쳐진 엄마를 요강 위에 앉히기는 11살 힘으로는 힘에 버거운 상태였다. 2년여 동안 잠자는 나를 깨워 소변을 보았다. 잠결에 요강과 같이 나뒹굴어져 한밤에 북새통을 치른 적이 많았다. 수업 중에도 오줌 마려워 날 부르는 소리가 귓전에 맴돌아 옆에 짝꿍도 선생님이 간혹 불러도 못 들을 때가 많았다.

설날에는 엄마 방에 자지 않았다. 새 옷을 입고 냄새나는 엄마 방에 가기가 싫었다. 새 신발 신고 또래들과 이웃집 어른 세배하러 가자는 형들과 어울려 다니다 보니 세뱃돈이 제일 많이 모였다. 아마 엄마 바라기로 소문 난 철부지의 남의 집 방문이 기특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1남매 중 생존한 오 형제 중 넷째 형과는 11살 나이 차가 난다. 소변이 마려운 엄마는 밤중에 나를여러 번 불렀다고 한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엄마는 온 힘을 다해 목청껏 나를 부르다가 혼절하였다.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이틀 후에 돌아가셨다. 모두가 내 잘못으로 지금까지도 죄책감에 트라우마로 남아 가슴이 미어진다.

엄마는 가슴에 묻은 자식이 다섯이나 된다. 질병으로 떠나 보내야만 했고, 6·25 피난길에 잃어버리고, 17살까지 키워 늑막염 재발로 끝내 구하지 못하기도 하셨다. 열 명이 넘는 그 많은 자식 낳는다고 고생하신 우리 엄마, 먼저 보낸 자식들 생각에 시름이 깊었지만, 남은 자식 육 남매를 위해 그렇게도 고생하시던 어머니는 아까운 56세의 나이에 이 세상을 홀연히 떠나셨다.

1971년 어버이 날 엄마 산소에서, 가운데 필자 (군인)제외하고 모두 고인이 되었다. 유무근 기자

3일 장례 동안 많은 조문객과 친인척 이웃분들께서 망자 만큼이나 내가 위로의 대상자였다. 격려 말씀과 용돈 주는 분도 많았다. 초상집인데 나는 마냥 잔칫집같이 들떠있었다. 장례를 마치고 평소대로 엄마 방에 갔다. 이게 웬일인가. 늘 그 자리에 계셨던 엄마가 보이질 않았다. 엄마가 없는 빈방에는 요강과 약봉지, 옷가지들이 널브러져 적막감이 돌았다. 아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하는 충격에 주저앉고 말았다.

밤마다 나는 엄마 꿈을 꾸었다. 하루는 엄마가 “무근아 대문 열어라!” 소리에 잠결에 반가워 “잠깐만” 답하며 맨발로 후다닥 뛰쳐나갔다. 마당이 넓어 대문도 멀게 느껴졌다. 큰 대문이라 발로 밀어 반동으로 문고리를 열었다. 세찬 바람에 밀려 대문은 활짝 열렸으나 나를 불렀던 엄마는 없었다. 매서운 회오리 바람만 나를 휘감았다. 혼자서는 무서워 못 가는 재래식 변소도 바람에 문이 열려있었다. 매일 밤 엄마를 그리다가 헛꿈을 꾼 것이다. 그날이 정월 대보름날 밤 축시(丑時)였다. 그날 이후로 엄마바라기 우울증으로 앓아누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엄마는 모래찜질을 좋아하였다. 그것도 팔달교 아래 모래사장을 좋아하였다. 내가 10살 때쯤의 기억이다. 가족들은 일찌감치 보리밥 두 소쿠리에 풋고추 된장과 약간의 밑반찬을 싣고 빨래 겸 물놀이 가족 소풍날이 되었다.

검정 우산 아래 얼굴만 남기고 뙤약볕에 달구어진 모래로 엄마 몸을 덮어주고 우리는 물놀이에 여념이 없었다. “밥 먹자”라는 부름도 아랑곳하지 않고 배고픔도 몰랐다. 문득 엄마 생각이 나서 달려와 보니 엄마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엄마 울었어? 물어도 안 울었다고 한다.

1958년 금호강 팔달교 모래 사장 전경. 필자가 조카와 경주를 하고있다  유무근 기자

조카들과 달리기도 하고 물 짱구 시합에 실컷 놀다가 엄마께 달려갔다. 계속 우셨는지 자국도 있고 눈물이 쭈룩 흘러내린 것을 보았다. 엄마가 말한다. “여기 네 형을 떠나보낸 곳이다.” 하며 눈물을 훔치신다. 자식을 떠나보낸 그곳에 먼저 보낸 아들 영혼이라도 위로하고자 엄마는 팔달교 아래 금호강 변을 자주 찾은 것이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이른 봄 팔달교 강변 둑으로 조깅을 하고 있었다. 이게 웬일인가. 혁대 같은 흑 구렁이 한 마리가 길을 막고 있었다. 방금 올라온 듯 윤기가 나고 날름거리는 혀 반짝이는 눈을 순식간에 마주쳤다. 피해야 한다는 반사적 행동으로 우회하여 속보로 걸었다. 무서움은커녕 그 뱀의 눈길이 심상치 않아 뒤를 돌아다보았더니 어느새 보이질 않았다. 혹시 엄마가?? 뜬금없는 생각이 스쳤다. 20초도 채 되지 않았다. 분명히 그 자리였다. 순식간이지만 영롱한 눈빛으로 교감은 있었던 것 같다.

엄마의 간청이 하늘에 닿아 뱀의 형상이라도 아들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원에 나타나셨을까? 먼 길 떠나시는 날까지 노심초사했던 막내를 보러 오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친다. 어리석은 중생의 생각이겠지 하면서도 이후에도 틈만 나면 팔달교 아래 강변을 걷는다. 흑 구렁이라도 좋으니 한 번만 더 나타나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갑자(甲子)를 돌아 60년 전 신축년 정월 초엿새날 삼배 두건을 쓴 나를 더듬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