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날 이야기] 낙동강 칠백 리 물류 집산지, 구포시장
[장날 이야기] 낙동강 칠백 리 물류 집산지, 구포시장
  • 강지윤 기자
  • 승인 2021.05.17 13:1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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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엔 좌판이 실핏줄처럼 늘어서 있다. 농사지은 콩으로 만들었다는 청국장은 주먹보다
튼실한 한 뭉치가 5천 원이다. "아직 우리 청국장 안 묵어 봤십니꺼? 맛있십니더" 아주머니가
내미는 청국장은 맛도 일품이다.

 

구포시장 장국밥은 대를 이어 내려온다. 설설 끓여낸 뜨끈한 국밥 한 그릇먹으러 일부러 시장을 찾는이도 있다
구포시장 장국밥은 대를 이어 내려온다. 설설 끓여낸 뜨끈한 국밥 한 그릇 먹으러 일부러 시장을 찾는 이도 있다. 강지윤 기자

매달 숫자 3과 8이 들어가는 날이면 구포 장이 선다. 3, 8 장이다. 요즘에야 새벽 배송에, 얼마 이상은 무료배송으로 택배 기사님들이 시장바구니를 날라다 주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구포 장이 서는 날이면 구포 인근 시장은 손님이 없다는 말이 나돌았다. 부산 지하철 2호선, 3호선이 만나는 덕천역이 있고, 1905년에 개통된 경부선 구포역이 지척이다 보니 부산은 물론이고, 인근의 원동, 물금, 삼랑진, 청도, 밀양 등에서도 새벽 기차를 타고 손수 길러 수확한 농산물을 이고 지고 장사꾼들이 모여들었다. 구포대교를 지나 김해 대저 명지를 지나는 노선버스도 지나다닌다. 명지의 대파나 대저 특산물 짭짤이 토마토 등 철마다 나오는 채소나 과일도 빠지지 않는다. 멀리 삼천포에서 온 생선 차 앞에는, 장날이면 제수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늘 붐빈다. 구포시장이 오랫동안 명성을 잃지 않은 데에는, 부산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과의 접근성이 뛰어나고, 낙동강 하구에서 올라오는 해산물이 두루 모이는 집산지라는 지역적 특성이 크다.

갖가지 젓갈로 가득한 골목은 장날이면 요리조리 피해 다녀야한다
갖가지 젓갈로 가득한 골목은 장날이면 요리조리 피해 다녀야한다.  강지윤 기자

 

구포는 강원도 태백시에서 발원해 부산으로 흘러드는 낙동강 끝자락에 있다. 낙동강은 영남지방 전역을 두루 거치며 흐른다. 흔히 말하는 낙동강 7백 리 뱃길이 바로 이 물길이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배가 낙동강 중류인 상주와 안동에서 구포를 오갔다. 육로보다 수로를 통한 운송이 주를 이루던 조선시대에 구포는 유통의 주요 거점이었다. 따라서 구포는 영남지역에서 생산된 물자는 물론, 내륙으로 갈 해산물이 모이는 집산지였다. 낙동강을 통해 내륙으로 보내는 물산은 우선 육로를 통해 구포로 모였다. 그러면 그 화물은 배에 실려 삼랑진이나 왜관으로 보내졌다. 이와 반대로 안동에서 내려오던 배들은 낙동강 유역 여러 곳에서 모인 벼를 싣고 구포로 내려왔다. 구포에 정미업이 발달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구포는 낙동강 하류를 대표하는 중심 나루터로 발전하게 된다.

기록에 의하면 18세기 후반부터는, 정부에 내야 하는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공물 대신 거두어들이는 쌀)를 저장했다가 한양으로 운반하던 기능을 하던 ‘감동창’이라는 조창(租倉)이 있었다. 이렇게 조창이 있어 물자가 모여들고 수로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오가는 사람을 상대로 객줏집과 주막이 성했으며, 교역의 중심지인 시장 역시 크게 발달했다. 1905년 경부선 개통으로 구포역이 생기며 번영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1932년에는 김해와 연결하는 ‘구포교’가 건립되었고 구한말에 이르러 구포장 일대는 영남 최고의 시장으로 우뚝 섰다.

일제 강점기 엄청난 양의 쌀이 일제에 의해 수탈되는 것을 본 농민과 상인, 젊은이 1200여 명이 1919년 3월 29일 정오 만세 운동을 일으킨 것도 구포장터였다. 1999년부터 매년 3월 구포시장에서는 ‘구포장터 3.1만세 운동’ 재현행사가 시행되고 있다.

이름표를 달고 선 갖가지 모종들이 금방 금방 팔려 나간다.
이름표를 달고 선 갖가지 모종들이 금방 금방 팔려 나간다.  강지윤 기자

 

구포시장은 1932년에 상설시장과 정기시장(오일장)이 함께 개설되었다가 그 후로 계속되고 있다. 1972년 구포시장 번영회가 발족하면서 2440㎡의 부지에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서며 당시 점포 수는 100여 개가 되었다. 그러나 구포시장을 이끈 것은 ‘구포 오일장’ 이었다. 8·15 이후에는 쇠전(牛市場)이 섰고 나무전에서는 땔나무가 팔려나갔으며 해방 이후 국수 공장들이 들어서 지금도 유명한 ‘구포국수’의 생산지가 되었다. 철 따라 수확되는 곡식과 채소, 이른 봄이면 취나물, 머위, 곰취, 잔대, 쑥부쟁이 등이 모여들고 요즘에는 고사리순, 두릅, 엄나무순 등이 제철임을 알려준다. 진주 수곡과 삼랑진에서 온 딸기가 끝물이 가까우면 성주 참외가 내려오고 곧 수박이 뒤따를 것이다. 얼마 후 남해 마늘알이 굵어져 마늘 시장이 서면 창녕 남지의 양파가 뒤따르고 한여름 뙤약볕에 잘 익은 고추장(場)이 서면 커다란 포댓자루에 담겨 줄지어 선 고추를 사기 위해 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룰 것이다.

 

농산물뿐만 아니라 통영의 멍게, 기장의 미역, 진해만의 굴, 가덕도 대구 등의 지역 특산 수산물과 약재들도 모여든다. 약초 시장 골목에는 각종 약재 도매상 20여 개가 있고 봄철이면 묘목 시장도 성업이다. 도시 농부들의 소일거리 농사나 집콕 시대 아파트 주민뿐 아니라 농사짓는 사람들도 많이 찾는다. 장터 한가운데서 ‘삐리릭’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면 ‘펑’ 소리와 함께 허연 연기가 피어오르고, 터져 나오는 사람들 웃음소리와 ‘쌀 튀밥’이 튀겨져 나오는 풍경도 볼 수 있다.

"새벽에 아들이 트럭으로 태워다 줍니더" 운문사 뒤쪽에 사신다는 아주머니는 산에서 딴 버섯과 열매들을 고르느데 여념이 없다
"새벽에 아들이 트럭으로 태워다 줍니더" 운문사 뒤쪽에 사신다는 아주머니는 산에서 딴 버섯과 열매들을 고르는데 여념이 없다.  강지윤 기자

 

큰 시장통을 벗어난 주택가 옆 작은 골목길엔 인근 김해나 양산 삼랑진 등에서 왔다는 할머니 아주머니들이 손수 기른 열무, 알타리무 등의 작물과 메밀묵, 도토리묵, 쑥떡과 송기떡 등을 늘어놓고 파는 좌판이 실핏줄처럼 늘어서 있다. 작년 농사지은 콩으로 만들었다는 콩을 띄워 만들었다는 청국장은 주먹보다 튼실한 한 뭉치가 5천 원이다. “아직 우리 청국장 안 묵어 봤능교, 맛있십니더” 햇볕에 까맣게 그을린 아주머니가 내미는 청국장은 맛도 일품이다. 운문사 뒤 깊은 산에서 따왔다는 영지버섯이며 유정란 오리알, 이름도 처음 듣는 약초들도 볼 수 있다. 마트나 슈퍼에서처럼 물건만 사는 것이 아니라 밀고 당기는 흥정도 하고 앞에 놓인 물건의 이력도 알게 된다. 구석구석 시장을 한 바퀴 돌다 보면 지갑은 가볍고 장바구니는 무겁다.

현재 구포시장은 750여 개의 점포가 있고 장날이면 1,500여 개로 늘어난다. 장날 찾아오는 고객 수는 3~5만을 헤아린다(2017년 자료). 구포시장은 세 차례에 걸쳐 아케이드를 정비했고 2011년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선정되어 ‘정이 있는 구포시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시장을 새롭게 단장했다. 시장 건너편에 24시간 운영하는 공영 주차장이 있다. 시장의 한 상인은 “날이 풀리니 사람들이 구경삼아 나온 기고 장사가 반타작이나 될라나, 앞으로가 걱정입니더.” 한숨을 쉰다. 듣는 이의 마음도 장바구니만큼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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