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어날 추억] ⑤ 선생님을 많이 배출한 '새마'마을
[꽃 피어날 추억] ⑤ 선생님을 많이 배출한 '새마'마을
  • 유병길 기자
  • 승인 2021.04.2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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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열 높아 선생님과 공무원 많이 배출한 상주의 자연부락
봄에는 진달래 붉게 물들고 가을에는 붉은 감이 마을 뒤덮어

1950년대 봉강리(경북 상주시 외서면)는 상주시에서 서북쪽으로 10여 Km 떨어져 있으며 은척면 가는 지방 도로와 인접한 곳이다. 봉강리는 새마(60여 호), 정철(20여 호), 행갈(20여 호), 기말기(10여 호) 등 네 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졌다.

노음산(해발 690m) 정상의 기가 북쪽으로 뻗어 내려온 능선이 새마 마을 뒤쪽에서 멈추며 물의 기와 만난 곳으로 명당이다. 새마 뒤 절터골 정상에는 옛날에 절(寺刹)이 있었다. 물이 마르지 않는 샘이 있고, 땅을 파면 기와 도자기 조각이 나왔다. 벌거숭이 야산은 큰 나무는 구경하기 힘들고 잡목만이 듬성듬성 서 있었다.

봄에는 진달래가 뒷산을 온통 붉게 물들이고, 초여름엔 알알이 부푼 산딸기가 수줍은 듯 손짓하면 아이들은 밥 먹듯 따먹으며 배고픔을 달랬다. 여름 장마 때는 비만 오면 시뻘건 황토물이 냇가를 넘쳐 논밭을 쓸고 지나간다. 며칠 지나면 물은 없고 흰 자갈만이 앙상하게 남아있는 마을 앞 냇가. 가을에는 붉은 감, 노란 조 이삭이 눈길을 끌었다.

마을 동쪽과 서쪽에는 수백 년 된 감나무가 군락을 이루어 봄엔 감 꽃향기, 여름엔 시원한 바람과 매미들의 협주곡을 감상하며 숨바꼭질하고, 가을에 먹음직스러운 붉은 홍시는 사랑을 받았고, 겨울엔 차디찬 서풍을 막아 주는 방풍림이 되었다. 하얀 분이 난 곶감을 손질하고, 눈이 오면 초가지붕 처마에 달린 고드름은 아이들의 유일한 장난감이다. 상주는 쌀, 누에고치, 곶감의 생산량이 많아 삼백의 고장으로 이름이 났다.

우산 재 너머 탄광에서 흑연을 백원역까지 트럭으로 실어냈다. 신작로에 떨어진 흑연 때문에 도로가 검게 변해 트럭이 지날 때마다 검은 먼지를 심하게 날렸지만, 누구도 원망하지 못했다.

수백 년 된 향나무밑의 공동우물. 유병길 기자
수백 년 된 향나무밑의 공동우물, 지금은 농업용수로 사용한다. 유병길 기자

마을 앞 공동우물 옆의 대형 분재 같은 멋있는 수백 년 된 향나무는 새마를 연상(聯想)하는 나무다. 초가집인 한옥은 방 2개에 부엌 1칸이 대부분이었다. 가족 3대가 한집에 살았기 때문에 방 하나에 5~6명이 같이 잠을 잤다. 부엌은 방문을 열고 밖에 나가야 했고, 화장실은 마당 가에 따로 있었고 목욕을 할 수 있는 시설은 없었다. 먹을 것이 부족하여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등잔대 위에 호롱을 놓고 석유를 넣어 심지에 불을 붙여 밤에 공부 길쌈 등 많은 일을 하였다. 유병길 기자
등잔대 위에 호롱을 놓고 석유를 넣어 심지에 불을 붙여 밤에 공부 길쌈 등 많은 일을 하였다. 유병길 기자

호롱불을 켜고 공부하고, 길쌈하고, 가마니 짜기, 새끼 꼬기 등 일상생활을 하였다. 성씨는 김씨 이씨가 제일 많고 유씨 정씨 박씨 길씨 순으로 많았고, 교육열이 높아서 선생님이 많은 동네로 인근에 이름이 났고 경찰 행정공무원으로 근무하는 분들도 있었다.

유덕준 씨는 일제강점기때 면사무소 직원으로 근무를 하셨다. 둘째 아들 유만식 씨는 박정희 대통령과 대구사범학교 동기생으로 교장, 경북도 초등 학무과장과 교육장을 하다가 중등 교장으로 정년퇴직을 하였다. 셋째 유남식 씨는 중등 교장으로 정년퇴직을 하였다. 손자 유병렬 선생님은 교감으로 퇴직하였다. 이목재 씨는 교장, 교육장을 하였고 교장으로 정년퇴직을 하였다. 이강모 씨 첫째 아들 이영재 선생님도 교장으로 정년퇴직을 하였다. 이두식 선생님도 교장으로 정년퇴직을 하였다. 마을 앞 우물가에 살던 이봉섭 선생님은 대구로 정근 가고 소식이 끊어졌다. 정봉조 선생님도 정근 가고 소식을 모르고 있다. 정해봉 선생님은 퇴근하면 농사일을 도와 드리는 효자였는데 삼십여 세 때 일찍 돌아가셨다.

거의 모든 집에 있는 디딜방아로 벼 보리를 찧고 쌀가루도 빻았다. 가마니 단위의 많은 량은 마을 복판에 있는 연자방아에서 소를 몰아 벼 보리 찧어 쌀 보리쌀을 만들었다. 량이 작은 쌀을 가루로 빻을 때는 나무 절구통, 돌절구통을 사용하였다. 기말기에 정미소가 문을 열면서 연자방아는 사라졌다.

부엌에 나가서 아침 점심 저녁 세끼 밥을 하면서 아궁이에 나무로 불을 때면 방은 따뜻하였으나, 새벽이 되면 온돌이 식어 방이 추웠다.

화로에 불을 담아 큰방 작은방에 두고 불을 쬐었다.
화로와 부삽, 불을 담아 큰방 작은방에 두고 불을 쬐었다. 유병길 기자

큰방 작은방에는 화로가 있었는데 소죽솥 아궁이에서 불을 담아 추울 때는 불을 쬐고, 간식으로 고구마, 밤을 구워 먹었다. 아이들은 계란 껍질에 쌀을 넣고 물을 부어 화롯불에 올려 쌀밥을 해서 나누어 먹었다. 불을 때어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드는 부엌은 문을 닫아도 바람이 통하여서 겨울에는 많이 추웠다.

향나무 밑의 공동 우물과 아랫마을 우물, 뒷동네 우물은 이른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아낙네의 발길이 계속 이어졌다. 좋은 소식, 나쁜 소식 등 모든 뜬소문의 진원지가 되던 곳이다. 집 집마다 부엌에는 큰 물독이 하나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면 어머니들은 종일 먹을 물을 동네 공동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려 버지기(항아리)에 담아 머리에 동그란 따뱅이를 올리고 버지기를 이고 와서 물독에 가득 채웠다. 중고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있는 집은 물지게로 물을 지고 와서 독에 물을 채워 어머니를 도와드렸다.

1960년대 초 부잣집에 펌프를 박아 편리한 것을 보고, 집 집마다 펌프를 박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모래가 썩어 올라왔으나 일 년이 지나고 깨끗하였다. 시원한 물을 언제나 마시고 사용할 수 있어 조금 편리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초가집의 구멍 난 방문의 문종이는 물을 뿌려 벗겨내고 문종이로 일 년에 한 번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초가을에 발랐다.

1950년~60년대 고향을 떠나는 출구가 돠었던 백원역. 유병길 기자
1950년~60년대 고향을 떠나는 출구가 돠었던 백원역. 지금은 열차가 서지않는 간이 역이다. 유병길 기자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배고픔의 고통에서 시달리던 젊은 부부들은 굶어 죽지 않고, 아이들 교육을 위하여 이불과 냄비를 싸서 지고 머리에 이고 아이들 손을 잡고 백원역에서 기차를 타고 김천역에서 서울로 서울로 떠났다. 중학교 진학 못 한 학생도 서울로 올라갔다. 고향을 떠난 분들도 허리띠를 졸라매며 자녀들은 대학교육을 시켜 대학교수 중등 초등 선생님들이 많았다. 농정사회가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젊은이들도 서울로 올라가면서 새마는 빈집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대대로 사는 가구가 14호, 외지에서 들어온 가구가 6호로 전부가 20여호로 옛날의 1/3이다. 1980년대 새기술을 도입한 젊은 선진농업인들이 배 사과 포도 과수원, 오이 하우스 재배, 양봉 덕분에 지금은 잘 사는 농촌으로 변모하였으나, 20여 년 아이 울음소리 들을 수 없는 마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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