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㊹사랑이 꽃피는 거리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㊹사랑이 꽃피는 거리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1.03.30 17: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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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마을에서 매일 만나면 정들기 예사
보는 눈 때문에 청춘 연애 제대로 못하고
짝사랑 애태우다가 결혼은 다른 사람과

쉰 호가 들판 가운데 엎드려 있는 소평마을은 집집마다 아이들이 많고 터울도 비슷해서 층층이 동급생이었다. 이 집에 6학년 3학년 1학년짜리가 있으면 저 집 애 셋도 각각 같은 학년이고, 위 아래로 두어 살은 또래로 편하게 지내다보니 소셔메트리(sociometry)를 그리면 마을 전체가 한 덩어리였다.

아침마다 학교로 가는 골목은 아이들 떠드는 소리로 시끌벅적하고 아침 일찍 논갈이 나가는 농부는 쟁기를 지게로 매고 아이들 사이로 소를 몰았다. 종달새가 보리밭 위로 솟구쳐 올라 신나게 아침노래를 불렀다.

아이들은 수업을 마치고는 즉시 집으로 와서 집안일을 도왔다. 동생을 보고, 방청소를 하고, 소꼴을 하고, 소를 먹이러 갱빈으로 갔다. 개구쟁이 꼬마가 제 몸집의 열 배도 넘는 소를 모는 장면은 가관이었다. 저녁이면 마을로 들어오는 길은 소들의 긴 행렬이 꼬리를 물었다. 소등에 올라타고 오는 아이도 있었다. 꼴망태는 얼마나 컸던지 아이는 망태에 파 묻혀 안 보일지경이었다.

어린 소년이 고래전 논을 가로질러 달리고 있다. 정재용 기자
어린 소년이 고래전 논을 가로질러 달리고 있다. 정재용 기자

이런 일이 일상이다 보니 아이들은 누구하나 힘들다 여기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렇게 집에 와 보면 부모님은 아직 돌아오시지 않아 반겨주는 것은 개뿐이었다. 아이는 소를 외양간에 들여 매 놓고 소죽을 끓였다. 한창 물이 끓고 있을 무렵 부모님이 돌아오셨다. 아이들은 부모님이 오시기 전에 모든 일을 마치려고 바쁘게 움직였다. 칭찬 듣는 게 목적이었다.

어머니는 저녁밥을 짓고 소죽 쑤는 일은 아버지가 이어받았다. 저녁을 먹으면서 모두가 하루 동안에 겪은 이야기, 보고 들은 이야기, 얻어 들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고추장, 된장, 풋김치가 전부지만 고봉으로 담은 보리밥 한 사발이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어른은 어른들 대로 같은 집안이고, 교인이고, 이웃사촌이라 흉허물이 없었다. 골목을 걸으면 대문이 없고 담장은 낮아서 그 집안 사정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농부는 일하러 나가다가 서로 만나고, 들어오면서 만나고, 일하면서 새참 먹을 때 불러서 함께 먹었다. 아낙네들은 빨래터에서 만나 수다를 떨고 우물터에서 새 소식을 들었다.

작은 마을에서 매일 만나면 정들기 마련일 터였다. 사춘기를 막 지난 소년 소녀는 마음이 들킨 것 같아 얼굴을 붉히며 서로가 눈길을 피했다. 여자 아이들이 떼를 지어 걸어가면 남자 아이는 앞지르기를 못하고 뒤처져서 터덜터덜 걸었다. 국어시간에 배운 플랜더스의 개는 벨기에의 파트랏슈가 아니라 소평마을의 워리로 다가오고 넬로와 아로아의 애틋한 감정은 그 여자 애를 향한 자신의 마음으로 느껴졌다.

중학생은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를 읽다가 주인공이 초등학교 5학년이라고 밝히는 부분에서 실망했다. 이탈리아 동화작가 아미치스의 쿠오레(‘사랑의 학교’로 번역)에 나오는 ‘난파선’은 가슴을 쓰리게 했다. 12세 소년 마리오가 또래 소녀 줄리엣에게 구명보트의 마지막 한 자리를 양보하고 최후를 맞이하는 이야기였다. 줄리엣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시켰다. 이 작품 역시 이탈리아가 배경이었다.

비밀이 없는 것은 좋고도 나빴다. 남의 눈 때문에 청춘은 연애 한번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냥 피차가 짝사랑이었다. 우물터에서 ‘그 여자’의 머리 위에 물동이를 들어 얹어주고 싶으나 그럴 수 없었다. 소꼴망태를 머리에 못 얹어서 끙끙대도 마찬가지였다. 소꼴망태를 남자는 망태를 오른쪽 어깨에 걸쳐 메고 여자는 머리에 이는 게 불문율이었다.

소년은 ‘그 여자네 집’의 골목을 지나며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 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노래를 속으로 불렀다. 그 여자네 집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샛노란 겹삼잎국화가 탐스럽게 피어 담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새하얀 박꽃이 달빛을 받아 빛났다. 활짝 웃을 때 드러나는 그 여자의 치아처럼 하얬다.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어쩐지 그 여자가 노란 꽃을 헤치고 고개를 내밀것 같았다.

오래 전에 어느 방송사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TV는 사랑을 싣고’가 있었다. 유명인사가 지난날을 회상하며 그리운 사람을 찾아 달라 부탁하면 방송국에서 추적해서 재회시켜주는 프로그램이었다. 거기에 황수관 박사가 출연하여 어릴 적 한 동네에서 자랐던 김숙자 씨를 찾는 순애보(殉愛譜)는 많은 시청자들을 즐겁게 했다. 그 배경이 소평마을이다. 명동댁 장남 황 박사는 앞실댁 장녀 김숙자 씨를 보기 위해 그 길을 지날 때마다 고개를 그 집으로 향했을 것이다. 앞실댁은 교회 가는 길가에 있었다. 빨랫줄에 빨래 하나가 정겹고 흙담에 박힌 돌 하나에도 정이 갔을 것이다.

1978년 설날 무렵, 마을 서편에 있는 큰거랑으로 가는 길. 정재용 기자
1978년 설날 무렵, 마을 서편에 있는 큰거랑으로 가는 길. 정재용 기자

곤실댁 집은 마을 들목에 있어서 집 앞은 언제나 사람들로 붐볐다. 바람 쐬러 나온 사람들은 곧잘 곤실댁 툇마루에 앉아 놀았다. 곤실댁은 6ㆍ25전쟁 때 남편을 잃고 딸 하나를 키우고 있었다. 그 딸은 예쁘고 착해서 총각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마을 안길로 들어가려면 곤실댁 담장을 왼쪽에 두고 들어가야 했는데 흙으로 쌓아올린 담장 안에는 커다란 무화과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총각들은 하릴 없이 들락거리며 무화과 열매를 찾는 양 집안을 기웃거렸다. 신학교를 졸업한 딸은 소평교회를 담임하던 전도사에게 시집을 갔다. 곤실댁도 노년에 딸네 집으로 이사를 갔다.

대부분의 청춘은 짝사랑으로 애만 태우다가 갑돌이와 갑순이처럼 헤어졌다. 3년간 군대생활을 마치고 와 보니 그새 갑순이는 소도둑놈이나 말대가리 아니면 인민군 촛대뼈 같은 사내를 따라가 버리고 마을에 없었다. 갑돌이는 양동산 위로 떠오르는 휘영청 밝은 달을 보며 분루를 삼켰다.

나라가 산업화 되면서 청년들이 객지생활을 하게 되고 마을사람들의 눈총을 벗어나서 사랑을 가꿔갈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동촌댁 아들과 금오댁 딸, 학봉댁 막내아들과 곤동댁 다섯째 딸 등 네댓 가정이 ‘자동혼사’(自洞婚事)를 했다. 신부집에서 마당에서 병풍치고 초례상에 닭 두 마리 올려놓고 거행하던 ‘꼬꼬재배’ 결혼식은 1970년대에 들어 읍내에 안강예식장, 백년예식장 등이 생기면서 점차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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