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 끝에 탄생한 작품들
작년 경상북도 '최고 장인상' 수상
야천도예(경북 고령군 성산면), 막사발의 장인 도공 문한조(65) 씨를 만났다.
대가야의 맥을 이어온 고령지역, 특히 토기문화의 전통을 더욱 계승·발전시켜 제4차 산업혁명과 더불어 세계에 고령 도자기의 우수성을 알리는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문 도공을 만나 외길 인생 도예와의 인연과 철학에 대해 들어보았다.
-도예와의 인연은 언제부터였나요?
▶경남 합천 가야에서 태어나 13살 때 합천 고려도기에 입문하여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1992년 3월 경북 고령 ‘한얼도자기’ 회사를 설립했죠. 보릿고래 어려웠던 시절, 학업보다 직업 전선에 뛰어 들었습니다.
▶국민 대다수가 헐벗고 굶주렸던 1970년대는 한국에 있어서 산업 경제의 태동기였습니다. 물자는 귀했고 노동자들의 임금은 보잘 것 없었지요. 소년 견습생으로서 그 시절을 감내해야 했던 일들과 그 후 도공을 비롯한 장인을 천시하는 사회적 인식으로 숱한 좌절을 겪기도 했습니다.
-도자기의 역사를 들려주시죠.
▶인류가 처음 토기를 만들어 사용한 시기는 대략 일만 년에서 육천 년 전쯤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 시대인 7~8천 년 전부터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 했지요. 초기에는 1,100℃ 이내의 화도에서 번조되는 도기와 석기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나, 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중국, 베트남 정도밖에 없었지요. 특히 우리나라와 중국은 그 조형이 독창적이고 양질의 자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9세기 전반 신라시대 중국과의 활발한 무역을 통해 청자 제조 기술을 받아들임으로써 토기 문화권을 벗어나 자기 문화권으로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통일신라시대부터 만들기 시작한 청자는 12세기 고려시대로 접어들어 더욱 발전하여, 당시 중국에서 “고려청자의 비색은 천하제일”이라고 할 만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리만의 독창적인 자기를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귀족 중심의 불교국가인 고려시대의 영향을 받은 청자는 그 화려함과 세련됨으로 많은 걸작을 남기고, 고려시대 후기를 정점으로 점차 사라져가게 되었지요.
▶세계 도자기사의 발전을 보면 토기에서 도기/석기로, 도기/석기에서 청자로, 청자에서 백자로 발전되었습니다. 청자에서 백자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에서는 15세기 초 고려 말 조선 전기에 '분청사기'라는 매우 특징 있고 우수한 도자기가 제작되는 과정을 갖습니다. 이 독특한 분청사기는 16세기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을 통하여 일본에 전파됨으로써 일본의 자기 발전의 시점이 되었습니다.
-주로 어떤 도자기를 만드십니까?
▶‘막사발의 장인'으로 불리죠. 막사발은 '막사기'로도 불리며, 우리 선조들이 밥그릇, 국그릇, 막걸리 사발 등 생활그릇으로 쓰이던 것들입니다. 막사발은 주로 서민과 머슴들에게 쓰였던 그릇으로 대접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으며, 벽면은 곧게 솟아 올라있고 아가리는 넓게 바지라진 형태를 갖고 있지요. 살이 두껍고 겉 표면이 부드럽지 않으며 까칠한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 땅에서 채취된 황토로 빚어낸 막사발은 밝은색의 장식이 없는 자연스러움이 담긴 사치스럽지 않은 그릇이죠. 막사발을 만든 사기장들은 대를 이어 평생 도자기를 만들었으나 그 생활이 무척 가난했고 무명(無名)으로 평생 무념(無念) 속에서 자연과 같이 자연의 일부가 되어 욕심이 없는 마음으로 도자기를 만들어 그 특징이 막사발에 배어 꾸밈없는 아름다움으로 드러났습니다.
▶조선시대 막사발의 종류로는 진해 두동리 사발, 하동 백련리 사발, 고성 사발, 단성 우리사발 등이 있다. 임진왜란 이후 막사발은 일본으로 건너가 찻잔으로 사용하였으며, 수수하고 꾸밈없는 자연미를 갖춘 생활용품으로 각광을 받았다고 합니다.
▶조선도공이 만드는 막사발은 보물(이도다완 : 井戶茶碗)이 되어 일본인들이 도자기 전쟁이라 부르는 한일전쟁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인들이 데려간 도공들은 일본 도자기 산업의 중심이 되었지요
-업계의 안타까운 점은?
▶돌이켜 보면 참으로 안타깝게 여겨지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은 장인정신의 퇴색으로 전통 명품을 만드는 장인들의 대마저 끊길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과거 우리 장인들은 작품을 제작할 때 처음부터 마무리까지 자신의 기량을 한껏 발휘하여 자신의 에술성을 만천하에 드러내 보였으나 작금에 와서는 도자기의 공장식 대량 생산으로 인해 이들 전통 장인들의 기술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전통 문화의 발전과 영속성을 기대한다면 장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대폭적인 처우가 먼저 해결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야천도예가 있기까지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
▶직원에서 경영자로 변신 ‘한얼도자기’를 설립 40여 명의 직원들과 함께 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하면서 10년간 경영하였으나 1997년 당시 한국경제에 불어닥친 국가 부도사태(IMF)로 혼신을 다해 일궈온 도자기 공장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오는 방황의 시간, 그로부터 20여 년간에 걸친 절치부심으로 이제 겨우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고, 더불어 마음의 평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업의 실패로 한때 “극단적인 생각도 했다”는 문 씨는 "실패를 성공을 하기 위한 인생 굴곡의 디딤돌로 삼았다"고 했다. 그것이 오늘날 ‘야천도예’의 밑그름이 되어 주었다.
-개인전 개최 및 수상 경력은?
▶1995년 5월 일본 고미츠 후후쿠다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처음 열었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30회 이상 개인전을 열었으며, 수상 경력도 20회가 넘죠. 구체적으로 2011년 12월 평화예술대전 특선, 2012년 12월 한국문학정신문화상 수상, 2013년 4월 한양공예예술대전 최우수상 수상, 2014년 4월 국토해양미술대전 심사위원, 2019년 12월 녹색환경 그린리드 대상 경북도지사상 수상, 2020년 11월 경상북도 최고 장인(명장)상 수상 및 2020년 12월 세계서법문화예술대전 국회의장상 수상이 대표적입니다.
-앞으로의 계획과 바람이 있다면?
▶전기 가스 가마를 버리고 전통에 애정을 가지고 혁신을 통하여 전통도예가로 거듭나려고 합니다. 화려한 기교를 부리기보다 자연을 그대로 담아내는 투박함과 흙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성질과 특성을 살려낸 자연스려운 표현을 하려고 합니다.
▶장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처우의 개선이 선결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전통 문화의 발전과 영속성을 기대할 수 있죠. 대가야의 맥을 이어온 우리 고령지역 특히 토기문화의 정통을 더욱 계승 발전시켜서 제4차 산업혁명과 더불어 전 세계 고령 도자기의 우수성을 알리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