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콘텐츠 개발자 진상욱 PnJ Partners 대표
시니어 콘텐츠 개발자 진상욱 PnJ Partners 대표
  • 강효금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1.03.10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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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학으로 배운 일본어로 떠난 유학길, 막 구조물의 세계적 전문가로
일본에서 만난 시니어 통해 시니어가 행복한 세상을 꿈꾸다

 

진상욱 대표의 시간은 열정으로 채워져 있다.  이원선 기자
진상욱 대표의 시간은 열정으로 채워져 있다.   이원선 기자

진상욱 대표는 막 구조물 유지·관리 분야의 세계적인 전문가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그를 막 구조물 전문가로 세상에 알렸다. 그에게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나고야대학 대학원을 세 번 만에 입학한 외국인, 나고야대학 환경학 연구과를 2년 만에 졸업한 외국인, 일본학술진흥회 특별연구원을 두 번 한 외국인 등등. 그런 그는 지금 시니어들의 삶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콘텐츠를 개발하고 만드는 일을 한다. 방향을 돌려 자신을 디자인하는 삶을 살아가는 진상욱 대표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도시를 꿈꾸던 시골 소년

-지금의 진상욱 대표를 있게 한 뿌리는.

▶제 고향은 경남 하동입니다. 지금은 관광지로 많이 알려졌지만, 제 어린 시절만 하더라도 시골이었습니다. 지금도 제 기억에 곱게 남은 것은 저만의 ‘지게’를 가지게 된 날입니다. 소를 먹이고 쇠죽을 끓이고, 나무를 하는 일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어린아이가 산을 타며 갈비(땔감으로 쓰기 위한 잔가지)를 모으는 일은 힘들었습니다. 특히 까슬까슬한 갈비가 등에 닿지 않도록 갈비를 모은 다음에는 비료 포대를 펴놓고 동그랗게 묶어 등에 짊어졌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다 쉬고 싶어도, 그대로 땅에 드러눕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열 살이 되자 아버지가 제 키에 맞는 작은 지게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 ‘지게’는 제게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인정받는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내가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에 신이 났습니다. 지게는 제게 ‘자유’도 함께 선물했습니다. 나무를 하다 힘이 들 때는 지게를 고정해 놓고, 마음껏 몸의 자유로움을 즐겼습니다.

재 하나를 넘어 산길을 따라 학교를 다녀야 했지만, 학교는 앎에 대한 갈증을 채워주는 마르지 않는 우물이었습니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집안일에서 벗어났습니다. 공부를 어느 정도 하니, 일보다는 공부에 집중하라는 집안 어른들의 배려였습니다. 누나 둘은 진주에서 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자취하는 누나들이 바빠서 집에 들르지 못할 때면, 저는 심부름을 자청했습니다. 김치며 반찬을 담은 보따리를 들고 20여 분은 걸어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 진주로 가는 버스를 타야 했지만, 저는 ‘도시’로 간다는 그 설렘에 그 정도 수고로움은 즐겁게 받아들였습니다. 누나들 틈에 끼여 잠을 청했지만, 제게 그 시간은 달콤하고 행복했습니다.

-고교 시절은 진주에서 보내셨나요?

▶그때만 해도 반에서 세 명 정도 진주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했습니다. 자취하는 저를 위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함께 오셔서 뒷바라지해주기도 하셨습니다. 대학은 건축을 전공했습니다. 당시 ‘우리들의 천국’이라는 드라마가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때 주인공이 건축학을 전공했는데, 덕분에 제가 입학할 당시에 건축과는 의과대학 다음으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당시 담임 선생님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가기 권했는데, 저는 굳이 건축과를 고집했습니다. 서울 유명 대학교에 지원했지만 떨어지고, 경상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처음에는 건축디자인을 전공하겠다는 생각에 미술학원에 다니며 데생도 배우고, 나름대로 미적 감각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했지만 막상 과제를 줬을 때, 한계를 느꼈습니다. 학원도 다니지 않은 제 친구가 너무도 쉽게 저보다 월등하게 디자인하는 모습을 보며, 건축디자인이 맞는가 하는 질문에 답을 찾으며 입대를 결정했습니다.

그 후, 복학을 앞두고 찾은 과 사무실 게시판에서 ‘일본 교환학생 모집’이라는 문구를 봤습니다. 제게 다가온 기회였습니다. 일본어를 공부하기 위해 일 년 휴학하고, 학원 봉고차를 운전하며 일본어 학원에 등록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어 전공자들이 대다수인 학원에서 진도를 따라가기 벅찼습니다. 저는 다시 학원을 그만두고 혼자 일본어를 공부했습니다. 일본어 능력 시험 2급을 따기 위해 전략적 선택을 했습니다. 읽기·듣기·문법·독해 네 과목 중에서 읽기와 듣기를 포기하고 문법과 독해에만 매달려 2급 시험에 통과했습니다. 그렇게 일본 교환학생에 지원하려 했지만, 또 다른 난관이 있었습니다. 휴학생은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까스로 복학하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지원했습니다. 우리 학교에서 다섯 명이 나고야대학교 교환학생으로 선발되었습니다.

 

 

일본 유학 시절, 실험에 성공한 뒤 동료와 즐거움을 나누고 있다.  진상욱 대표 제공
일본 유학시절, 실험에 성공한 뒤 동료와 즐거움을 나누고 있다. 진상욱 대표 제공

 

오늘을 잊지 말자

- 나고야 대학교에서의 일 년은 어떠했나요?

▶교환학생으로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난생처음 타본 비행기. 그 비행기 안에서 저는 감격에 겨워 떨리는 손으로 공책에 적었습니다. ‘오늘을 잊지 말자.’ 그건 저 스스로에게 한 다짐이기도 했습니다. 이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비행기가 일본에 도착하고 저는 긴장한 탓에 화장실부터 찾았습니다. 그 후에 알았습니다. 제 지도 교수와 그 교수님의 한국인 제자 한 분이 몇 시간 동안 비행장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비행기가 연착하기도 했지만, 그 마음이 고마웠습니다. 일본인 교수님과 선배님은 자동차 안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묻고 들려주며, 낯선 이방인을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일본어라고는 안녕하세요, 저는 누구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죄송합니다. 이 네 문장밖에는 모르는 저에게, 나고야대학교의 외국인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매일 아침 한 시간씩 일본어를 배우고, 다시 의무적으로 반나절 동안 일본어 수업을 들어야 했습니다. 특히 연구실에 소속된 전문 튜터는 저에게 안내자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습니다. 저는 틈이 날 때마다 튜터를 제 기숙사로 불러 라면도 먹고 김밥도 말아먹으며, 일본어를 배웠습니다. 그렇게 점점 교류가 활발해지며 많을 때는 대여섯 명이 좁은 기숙사 방에 들어앉아 놀기도 했습니다. 쑥쑥 일본어 실력이 늘어나는 것을 느끼며, 아르바이트 자리도 구했습니다. 재일 동포가 하는 불고깃집이었는데, 한국어도 하고 일본어도 할 줄 아는 아르바이트생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아르바이트하며 일본어 능력 시험 1급을 준비했습니다. 접시를 닦고 서빙하며, 틈틈이 A4용지에 적어 접어놓은 메모를 꺼내 외우고 익혔습니다. 12월에 있은 1급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우리 반 총 다섯 명 중에서 세 명이 합격하며, 나고야대학교에서는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교수님이 우리를 불러 격려해 주셨습니다. 저는 제 지도교수님께 대학원을 나고야대학으로 오고 싶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교수님은 석사는 일본인과 같은 조건으로, 외국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봐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다시 우리나라로 들어와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석사과정을 준비했습니다. 대학 과정을 마치고 일 년의 연구생 과정으로 일본으로 들어왔습니다. 아버지께 비행기 삯과 한 학기 등록금만 받아 들어왔기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두 번의 대학원 시험에서 쓴잔을 마셨습니다. 영어 실력이 부족했습니다. 저는 여기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르바이트하는 사장님께 호주에 갈 비행기 삯을 꾸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사장님은 아무 조건 없이 3백만 원을 주셨습니다. 호주에 도착해서 다시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그때 알게 된 것이 우프(WWOOF, Willing Worker On Organic Farm)였습니다. 우퍼는 호주 정부가 정책적으로 마련한 것으로, ‘우프’라는 책자를 사면 농장주는 노동력을 받을 준비가 된 것으로 여겼습니다. 농장주는 숙식을 제공하고, 저 같은 사람은 노동을 제공하는 것으로 계약이 성립됩니다. 노동은 오전만 하면 되고, 오후에는 농장 주인과 함께 승마· 수영 같은 레크리에이션을 즐기도록 구성되었습니다. 오렌지 농장도 가고, 양과 말도 키우고, 잔디도 입히는 다양한 일을 경험하며 생활영어를 배웠습니다. 누구보다 일에는 특화되어 있어, 제가 떠날 때는 농장 주인들이 조금 더 있으면 안 되겠냐고 할 정도였습니다. 브리즈번에서 멜버른에 이르는 일곱 달에 걸친 여행을 통해, 저는 몸이며 마음이 단단해졌습니다.

은사인 오모리 교수님께 연락이 왔습니다. 일본 문부성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오로지 공부만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생각에 뛸 듯이 기뻤습니다. 주거지· 학비 모든 혜택을 받았지만, 저는 연구실 바닥에서 하루 세 시간 정도 잠을 자며 석사 과정 준비를 했고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원하던 오모리 교수님의 연구실, 일등에서 4등까지만 들어갈 수 있다는 그 연구실에 들어갔습니다.

 

저 분을 닮고 싶다

- 특별한 전공을 택한 이유는.

▶오모리 교수님을 보며 ‘선구자의 길’을 생각하게 됩니다. ‘무주 대공간’이라는 기둥이 없는 넓은 공간의 지붕 설계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공학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분야인데, 수학이 바탕이 된 학문이라 따라가기 힘들었습니다. 저는 빨리 졸업하고 돈을 벌어야 하기에, 제가 할 수 있는 주제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막 구조물’이었습니다. 천을 평평하게 만든 다음, 눈·비에서 구조물을 지키는 막이 제 마음을 끌었습니다. ‘막’은 아름다운 구조물입니다. 예민하고 다루기 힘들지만, 막 구조물은 예술적인 우아함과 기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그 이전까지 두드리고 눌러보고 하는 것이 전부였던 막 구조물에서 ‘장력을 측정하고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세계 최초 발명자로 특허 출원도 했습니다. 국제 학회에 초청받아 발표도 하며, 4년 만에 석·박사 과정을 끝냈습니다. 2002년 나고야대학교에 ‘환경학 연구과’가 신설됐습니다. 환경을 사회 환경· 자연 환경· 도시 환경 분야로 나누어 보다 큰 틀에서 유기적으로 ‘환경’을 바라보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만든 환경학 연구과에서 저는 ‘도시환경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학위를 받고 4개의 상을 받았습니다. 40세 이하 젊은 연구자에게 수여하는 ‘일본 건축학회 장려상’ ‘마에다공학진흥재단 우수박사학위 논문상’, 토카이 지역 논문상인 ‘토카이 상’, ‘막 구조 논문상’. 상금만 70만 엔으로 이때만 해도 앞길이 순탄할 줄 알았습니다.

- 예상치 못한 일이 있었나요?

▶2011년 일본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아내는 그 대지진을 보고 경험하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방사능 이야기까지 쏟아지면서 아내와 아이들은 한국으로 보내고, 저는 일본에 남아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심한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생각지 못한 복병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교수님도 제 불안정한 모습을 눈치채고, 2012년 5월까지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막상 한국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일자리를 찾기 쉽지 않았습니다.

마침 2012년 초에 ‘IASS(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Shell and Spatial Structures, 국제대공간학회)’가 서울에서 열렸습니다. 지도교수님은 못 오시고 제가 책임자로 연구실 부원들을 이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거기 모인 관계자에게 “막 구조 전공으로 세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재를, 한국인으로는 십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는 인재를 왜 쓰지 않느냐”고 이야기했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이야기는 들었다며 제게 몰려왔습니다. T회사의 대표가 인천 문학경기장을 자문했습니다. 저는 흔쾌히 대답했습니다. 막 구조물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로 나선 것입니다.

 

제주 월드컵 경기장에서 막을 점검하는 진상욱 대표
제주월드컵경기장에서 막을 점검하는 진상욱 대표. 안전장치는 하고 있지만, 줄을 걸 데가 없어 늘 위험이 도사린다.  진상욱 대표 제공

 

막, 그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날카로움을 지닌 존재

- 이론과 실제 사이에 경험도.

▶이론으로만 존재하던 것들을 현장에서 적용하고 관찰하면서 많은 부분을 배우고 얻었습니다. 고척 스카이돔에서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고 실험을 진행한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 대구, 제주, 고양 등 국내 대형 스타디움의 유지·관리 현장에서 많은 일을 진행했습니다. 그때 한국교육기술대학교에서 연구교수도 제안 받았습니다. 저는 막이 지닌 우아한 아름다움을 좋아합니다. 마치 기품 있는 사람처럼, 잘 만들어진 막 구조물은 영감과 가슴 뛰는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막 구조물 유지·관리 회사’를 창업하며, 직접 사업에도 나섰습니다. 저는 기술적인 면을 담당하며, 여러 프로젝트를 맡았습니다. 하지만 경영에 대한 경험이 없던 제게 그 회사는 아픔으로 남았습니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끝내 그 사업을 접어야 했습니다. 애정을 쏟았지만, 실패였습니다. 값비싼 경험이었습니다. 다시 한 건설회사의 일을 맡으며 일본을 여러 차례 오가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 노인과 미래에 주목하다

-일본에서 새로운 계기가 있었나요?

▶철강과 관련된 일을 하며 일본을 오가던 중에 상당히 충격적인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그날 일본 회사의 담당자와 미팅이 잡혀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아버지가 나왔습니다. 저는 대표인 줄 알고 대표님이 안 나오셔도 되는데 하고 얘기했더니, 그분이 자기가 담당자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 뒤로 만난 많은 관련 분야 엔지니어가 모두 시니어였습니다. 그분들은 얘기했습니다. 젊은 엔지니어가 없다고, 더는 힘든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고. 저는 마치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를 보는 듯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우리 회사는 2D 도면을 3차원으로 바꾸는 BIM을 하는 회사입니다.

하지만 계속 일본을 왕래하며 ‘시니어 분야’에 눈길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마음이 이끄는 대로 시니어 박람회와 의료 분야·돌봄 서비스 현장을 찾아다니며, 우리의 미래가 될 시니어에 대해 정보를 모으고 연구했습니다. 이윽고 삶의 질과 밀접한 ‘시니어의 건강’에 대해 주목했습니다. ‘치매’라는 복병에 대비하기 위해 뇌력을 개발하는 프로그램에도 생각이 미쳤습니다.

-치매예방프로그램에 주목하게 된 이유는.

▶시니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치매입니다. 저는 시니어들을 ‘치매에 대한 불안’에서 해방하고 싶었습니다. 치매예방은 온 마을과 사회구성원이 함께 고민하고 올바른 이해를 할 때,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우리보다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된 일본과 미국, 캐나다, 유럽의 자료를 찾고 논문을 읽으며 ‘치매예방’을 위한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신체활동을 비롯한 식생활이 포함된 라이프 스타일을 제시합니다. 이 프로그램의 형태는 다양해서 치매예방전문가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스스로 자신의 치매를 예방할 수도 있습니다. 직접 자신의 생활습관을 점검하고 거기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치매에 대한 불안을 지워버릴 수 있습니다. 일회성 교육에 그치지 않고, 후속 프로그램을 통해 ‘함께하는 문화강좌’도 진행합니다.

-‘뇌력’, 튼튼한 뇌를 만들기 위해 개발한 프로그램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모여樂, 웃어樂, 설레樂, 뇌체력 오르樂, 치매불안 내리樂 ‘5樂 4다리’와 뇌력·체력 향상 카드를 만들었습니다. 이것 모두 상표와 특허 출원을 마쳤습니다. 5樂 4다리는 어린아이부터 시니어까지 온 가족이 즐겁게 할 수 있는 놀이입니다. 카드에 쓰인 설명과 규칙에 따라 게임을 하다 보면, 생각하는 힘이 향상되는 프로그램입니다. 그 놀이 방법도 너무나 다양해서 얼마든지 변화 시켜 즐길 수 있습니다. 야외든 실내든 어디든지 가능한 이 프로그램을 다양한 형태로 보급하고 싶습니다. 어린이집부터 경로당과 복지관, 각 가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즐겁고 행복하게 즐기면 좋겠습니다. 실내뿐 아니라 우리나라에 수없이 많은 둘레길과 자락길에도 설치되어 오가는 시민이 바닥에 새겨진 5樂 4다리를 경쾌하게 건너다니길 바랍니다.

저는 지금도 매일 ‘시니어들이 행복한 세상 만들기’를 꿈꿉니다. 잠자리에 들 때도 제 머리맡에는 메모지와 필기도구를 둡니다. 자다가도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저를 아는 친구들은 이야기합니다. 왜 그렇게 어려운 공부를 하고 ‘치매’ 이냐고. 저는 대답합니다. 치매에 대한 불안을 0으로 만들고 싶다고. 어르신들이 건강한 삶을 마무리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제 목표의 1단계는 뇌력과 체력을 향상하는 일입니다. 2단계는 시니어들이 사회구성원으로의 삶을 유지하는 겁니다.

저는 지금까지 제 삶을 디자인하며 살아왔습니다. 공부도 더 이상 할 수 없을 만큼 했고, 창업도 하고 실패도 했습니다. 하지만 늘 도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끝자락에는 무엇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때까지 저는 도전을 멈추지 않을 생각입니다. 제 아이들에게, 많은 좌절 속에 잠겨 있는 청년들에게 일어서 도전하라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을 디자인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 되기를. 그들의 도전과 용기를 응원합니다.

그의 열정은 식을 줄 모른다. 그가 디자인하는 시간 속에는 모든 사람이 행복한 세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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