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2)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2)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1.03.08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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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체를 모잽이로 삐딱하게 돌리더니 술잔을 내민다. 입 안 가득 고인 침이 넘칠 듯 입술을 밀어내고 있다. 쥐불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이다.
​2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수성구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2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수성구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별스럽게 뭘~ 또~ 본다고 그래요! 어제도 보고 아래도 보고...! 달포 쯤 지나, 날 따스해 지고 농사일이 시작 되믄 논두렁 밭이랑에서 맨날 천 날 볼긴데...! ” 하더니 길게 쉼 호흡을 한 뒤 주위를 일별하는데 얼굴 위로 부끄러움이 덕지덕지 묻어난다. 하지만 이왕에 내친 걸음이다. ‘으~으음’하고 목청을 가다듬는가 싶더니,

“글구 영희아부지요 이만 하믄 뉘 집 못잖게 상다리뿌라지게 차맀다 아잉교, 흰소리는 그만 하고 술은 파파머리에 쭈그렁 방티 같은 할맬지라도 여자가 따라야 꿀 탄 듯 달다맨서요 변변찮지만 나도 치마 둘렸다 아닝교, 내 웅이 박힌 나뭇가지 같은 손일망정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한잔 따랐네요 한잔 쭉 들이키소”하고 일장 연설 끝에 해설픈 웃음을 띄워 상체를 모잽이로 삐딱하게 돌리더니 술잔을 내민다.

“그기 또 그렇게 되는 갑요. 좌우간 몰라뵈서 미안쿠먼요. 그라고 지신일랑은 잊아뿌소 이잔 한잔 쭉~ 하고 네거리 김씨네 구멍가계 두더지 잡는 기계처럼 자발없이 들이미는 대가리가 남해악신이든 북해악신이든 천지간의 악신이든 하여튼 디밀어 쌓는 대가리란 대가리는 아주 자근자근 밟아 다시는 햇빛도 못 보게 할거구만요” 말을 받고는 양손으로 공손히 술잔을 받는다.

평소 같으면 불퉁스럽기가 한량없어 말붙이기조차 겁나, “따룻키는 뭘 따라요 내가 뭐 읍내 삼거리에 있는 ‘춘희’집 주모로 아는 갑소 얼굴이라곤 밀가루 처바르듯 허옇게 칠한 년이 부끄럼을 쌈 싸 먹었는지 가슴이 훤하게 들어나는 잠자리 날개 같은 망사를 옷이라 걸쳐 입는 것도 모자라 주디꼬라지 하고는 쥐 잡은 듯 삘겋게 칠한 것이 영희아베가 어여 한잔 따룻지 하면 기다렸다는 듯 그러게요. 잔이 빈 줄 몰랐네요. 쇤 내가 미안 쿠만요 낼름 따룻케 그캐 술 곱프믄 지부지처 하소”하고 맞받아칠까 싶어 속으로 은근히 두려운 마음이 일고 있던 터였다.

하긴 마음속으로 지래짐작한 안주인의 말이 하나 틀린 말은 아니다. 아무리 허물없이 지내는 이웃지간이라 해도 남녀 사이는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솔방울 하나가 눈밭에 구르면 별일이 아닌 것 같지만 우연찮게 산비탈을 만나면 대책 없는 눈사태로 발전하듯 남녀 간의 풍월에 소문이라는 빌미가 발이 되고, 입과 입을 거치며 무성하게 펴져나가기에 당연히 내외를 하는 것이 신상에 좋은 것이다. 그래야 남 보기에 부끄럽지도 오해를 살 여지가 없는 것이다.

헌데 받아 든 술잔의 둥그런 모양새가 정월 대보름달을 빼다 박았다. 희한타 싶어 고개를 숙이는데 얼굴이 비치고 에메랄드빛 하늘을 고스란히 닮았다. 하늘 중앙의 새털 같은 흰 구름도 양념으로 떴다. 선뜻 들이키기가 뭣해서 술잔 위로 잠깐 눈길을 준다. 그런데 꿈인가 생시인가? 사발 전을 넘쳐 쏟아질 듯 찰랑거리는 막걸리사발에서 아련한 옛 향수가 피어오른다.

깜박이는 촛불아래 다소곳한 마누라와의 첫날밤이 술잔 위로 둥둥 떠온 것이다. 족두리를 쓴 아래로 아주까리동백기름을 발라 윤기가 차르르 흐르는 까만 머릿결, 뽀얗게 분을 바른 얼굴 위로 동그랗게 찍은 연지곤지가 곱게 도드라지고 복사꽃빛 옅은 빛깔로 살포시 양 볼을 붉혀 합환주를 마주하여 앉아있는 것이다.

아찔하다 못해 혼곤할 지경으로 평소에는 못 느꼈는데 또 한편으로 보니 팔불출을 자처해도 욕은 안 먹을 것 같다. 그건 그렇고 갑자기 집에서 송편 빚는 마누라가 생각나다니...! 지금껏 동네를 돌아 돌며 얻어먹은 술이 턱밑까지 차올랐다가 한꺼번에 얼굴을 향해서 치솟는 느낌이다. 벌겋게 단 시우쇠처럼 얼굴이 화끈거리고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온다. 또 한편으로는 입 안 가득 고인 침이 넘칠 듯 입술을 밀어내고 있다. 아닌 방중에 홍두깨라더니 참 별스럽다 싶어

“거~ 막걸리 한번 시원하고 달게 보인다” 며 헛소리처럼 중얼거린 뒤 사발 전을 거머 잡은 손에 엄지손가락이 푹 담기도록 다잡아 단숨에 들이킨다. 막걸리가 목구멍을 타고 넘는지 목젖이 울퉁불퉁 불 맞은 뱀처럼 요동친다. 성급하게 들이키다 보니 입가를 넘쳐 목줄을 따고 흘러내린 막걸리가 옷깃을 흥건하게 적신다.

옷깃에 감도는 막걸리는 손으로 툭툭 쳐서 털어내고 낙동강의 어느 지류처럼 입가로 흥건한 막걸리줄기는 소맷자락으로 ‘쓱’하니 훔친다. 자신도 모르게 ‘크~ 억’하는 트림이 식도를 지나 울대에서 하모니를 이루고 입안서는 “거~ 막걸리 한번 달고도 시원타. 아줌씨가 따라준 잔이라 그런지 더 맛있는 것 갑소”하고 읊는다. 뒤질세라 매기주둥이 같은 입은 헤벌쭉 바소쿠리가 벌어지듯 벙글어진다.

어른들만 그럴까?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놀기에 여념이 없다. 바람을 가르며 무작정 고샅을 누빈다. 희희낙락 웃음이 끊어질 줄 모른다. 저마다의 손을 빌어 볶은 콩이며 후두랑 잣 등등의 부럼이 한 움큼씩 들려 있고 호주머니조차 터질 듯 불룩하다.

해가 저물어 밤이 되면 남녀노소가 따로 없는 세상으로 변한다. 마음속에 품었던 소원을 붓으로 정성껏 눌러 쓴 고만고만한 한지쪼가리를 잔뜩 둘러 쳐서 임산부 모양 축 처진 아랫배가 무거워 보이는 달집에 불을 붙이는 시간이다. 다비식 때의 “스님 불 들어가요”대신으로 진행자의 “세상에 생긴 복이란 복은 있는 데로 들어오고 액운이란 액운은 설령 티끌일지라도 빠짐없이 물렀거라”는 덕담과 함께 달집에 불을 지피는 것이다.

청솔가지 타는 냄새가 매캐하게 풍겨나고 물컹물컹 오르는 검은 연기가 눈에 아리다가 푸르게 변해간다. 그것도 잠시 종내는 뿌옇게 하늘을 흐린다. 불어오는 바람결에 휘휘 내둘리며 하늘을 향해 허옇게 머리를 풀어헤치는 달집, 촛불이 스스로 제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힌다면 달집은 스스로 제 몸을 태워 액운은 하늘로 복은 땅 위로 쏟아 붓는 역할을 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오로지 건강을,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야든지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고, 처녀총각들은 좋은 직장에 취직, 헌헌장부에 요조숙녀를 끼리끼리 만나 결혼하고 아들 딸 낳게 해 달라고 소망한다.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달 집을 향해, 달을 향해 양손을 합장하고 머리를 조아리는 때다. 다양하게 모인 사람 만큼이나 각양각색의 소원과 기원을 달집과 보름달을 빌어서 축원하는 것이다.

정월 대보름달은 어느새 하늘 충천에서 훤하다. 세상 사람들의 소원을 몽땅 품어선지 넉넉하면서도 한결 푸짐해 보인다. 겨울밤이 바람결 속에 비수와 칼날을 숨겨 얼굴을 할퀴어도 소용이 없다. 이글거리는 달 집 주위를 돌고 도는 농악놀이가 정점을 이루고 뒤를 이어 강강술래가 등장한다. 녹의홍상, 곱게 차려 입은 동네 아낙네들이 손에 손을 맞잡고는 불 주위를 나비 떼처럼 난분분 날아든다.

“술래술래 강강술래 강강술래/술래좋다 강강술래 강강술래/달떠온다 달떠온다 강강술래/동해동창 달떠온다 강강술래/정월이라 대보름날 강강술래/술래술래 강강술래 강강술래/각시님네 놀음이라 강강술래”

불티가 팔랑팔랑 몸을 뒤집으며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뇌를 지배하여 정신을 흐리고, 심장을 갉아 먹고, 피를 빨고, 게임을 유혹하는 등등의 모든 액운들이 사위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살림살이가 한층 넉넉해질 것이다. 지옥나찰같이 표독하고 지독스러운 ‘코로나19’가 사위어질 것이다. 이태를 거듭해서 곪아터지기를 반복하는 상처에 가피가 내려앉듯, 물로 씻어 낸 듯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천둥벌거숭이들의 정월 대보름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밤 깊은 줄 모르고 들판을 누비는 저마다의 손과 손에는 불통이 하나씩 들렸고 발정 난 노루새끼마냥 껑충거린다. 넘어지고 자빠지고 팔꿈치와 무릎 등에 생채기가 나서 피가 흘러도 좋단다. 더 이상 아프지도 않단다. 훤한 달빛아래 너나없이 간스메(통조림)깡통에 못으로 성글게 구멍을 내고는 관솔, 솔방울 등을 잔뜩 집어넣어 철사 줄을 길게 늘여 손잡이를 만든 뒤 붙을 붙여 휘휘 돌리는 쥐불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이다. 여름 한 철 메뚜기가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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