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지하철참사 18주기] 그날을 기억하십니까?
[대구지하철참사 18주기] 그날을 기억하십니까?
  • 박영자 기자
  • 승인 2021.02.1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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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기력함을 벗어날 수 있었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2002한일월드컵~!!

병마에 시달리던 남편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언제 이런 큰 사건들을 생전에 접할 수 있겠냐"며 좋아하다, 슬퍼하고 아파하며 살다가 그해 연말에 미련 없이 가버렸다.

그 후 몇 달간 집안에 틀어박혀 울고만 있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고 먹을 수도 없이 그저 죽고만 싶었다.

바로 그런 때였다.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힘들게 살고 있을 때 대구중앙로 지하철 참사가 터졌다.

오늘로 꼭 18년이다. 2003년 2월 18일 화재참사의 아픈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9시53분 지하철1호선 중앙로역에 지적장애인 김대한(56) 씨가 휘발유에 불을 붙여 방화하면서 안심방향 1079열차 내부에 불이 번졌다. 불길은 마침 승강장에 진입하던 대곡방향 1080열차에까지 번졌고, 대합실과 역사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

객차 12량 모두 전소, 사망자 192명, 부상자148명에 614억 원의 재산피해가 발생한 대참사였다.

낮 12시쯤 적십자에서 비상연락이 왔다.

 

 

남편 잃은 슬픔에 잠겨 그동안 두문불출하고 있던 나는 자신도 모르게 현장으로 달려갔다. 봉사원들은 정신없이 물, 음료수, 라면 등을 날랐다.

소방관들의 얼굴은 탄광촌 아저씨 같았다. 그들은 인근 도로까지 유독가스와 냄새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어 쉽사리 접근을 못하고 교대로 들락거렸다.

우리 적십자 봉사원들은 인근 만경관 쪽 따로국밥집 앞으로 가서 부스를 설치하고 분주히 봉사를 했다. 2월이라 해도 몸과 마음이 얼어붙어 더욱 추운 것 같았다. 발을 동동 구르며 유가족들과 함께 분향소를 지키며 함께 울었다.

새벽 6시가 되면 시민회관으로 가서 급식을 했다. 그리곤 바로 삼륜차에 밥을 싣고 법원 앞 유가족들의 성토장까지 급식하러 가야 했다. 사연 사연을 들을 때마다 그들의 아픔이 내 아픔과 같아서 남보다 더 많이 울었다.

종일 그들과 함께하다 밤 10시가 되어 집에 오면 녹초가 되었다. 낮엔 어디서 힘이 났던지 무거운 것도 번쩍번쩍

들어올리며 죽어라 일을 했다. 어느 날 가슴이 뻐근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파스를 붙이고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어 병원에 갔더니 갈비뼈가 부러졌단다. 어디서 부러졌는지 기억도 없었다. 약 먹어가며 가슴을 동여매고 근 두 달간을 더 봉사했다. 돌이켜보면 그들의 아픔으로 내 자신의 아픔을 치유한 것이 아닌가 싶어 감사히 생각한다.

 

 

18년이 지나 다시 2월 18일이 다가왔다. 그날의 기억과 함께 그들의 영혼에 국화꽃 한 송이 놓고 좋은 곳에 다시 태어나 아프지 말고 행복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몇 년을 벼르다가 용기를 냈다.

중앙로역 주변을 두세 번 서성이다 용기 내어 찾아갔다. 그때 그 순간의 사진들과 흔적들을 마주했다. 유가족들은 아직도 아픔과 그리움 속에서 얼마나 많은 엄마 아빠와 자식들의 이름을 불러대며 살고 있을지. 미안하고 궁금하다.

그대들이여~ 좋은 곳에 다시 태어나 못다 한 꿈과 행복한 삶을 살기를…. 중앙로역 3번 출구를 나오는데 자꾸만 뒤가 돌아 보였다. 그때 그 순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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