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㊷장산댁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㊷장산댁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1.02.16 10: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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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평교회의 기둥 같은 일꾼 임철조 집사
그의 ‘문둥이 이야기’는 전매특허였다

장산댁은 임철조 씨의 택호였다. 그에게는 구광본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그를 장산댁 아니면 ‘광본이 엄마’로 불렀다. 전통사회에서 결혼한 여성의 이름은 없었다. 택호 아니면 남편 이름의 처(妻), 아이 이름의 엄마였다. “평생을 함께 살아도 시어머니 이름 모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자식 기르며 이름 없이 살다가, 죽어서도 명정이나 상석(床石)에 본관(本貫)과 성씨만 남겼다.

유일하게 여성의 이름을 불러주는 데는 교회였다. 장산댁은 소평교회 “임철조 집사”였다. 임 집사는 구정순(명동댁, 맹동댁), 이분이(곤실댁), 임필순(명포댁, 맹포댁), 황분조(학봉댁) 집사 등과 어울려 뜨겁게 신앙생활을 했다. 당시 교역자는 이규철 전도사(1967년 9월부터 1970년 12월까지 시무)였다.

이들은 서로 친인척간이기도 했다. 구정순과 임필순 집사는 시누이올케 사이, 임필순과 임철조 집사는 동서 간이었다. 구정순(황봉룡 집사의 아내), 구연암(임필순 집사의 남편, 별호 연바우), 임철조 집사의 남편은 친동기(親同氣)간으로 영일군(현재 포항시) 연일에 살다가 해방 즈음하여 농토를 따라 소평마을로 이사했다. 거기다 구정순 집사와 이분이 집사는 종동서(從同壻) 간, 황분조(정응해 집사의 아내) 집사는 황봉룡 집사의 종질녀였다. 구정순 집사는 황수관 박사의 어머니다.

그리고 김해수(강대원 집사의 아내), 정두선(김우중 집사의 아내), 엄일녀(앞실댁), 김루미(서호댁), 김순자(김용한 집사의 아내), 강미자(김성우 집사의 아내), 김순기(황수경 집사의 아내), 안영아(김영우 집사의 아내), 윤화순(최영춘 성도의 아내), 신경이(김창문 집사의 아내) 집사 등의 충성스러운 여자 집사가 있었다.

1969년 봄 강동면 낙산동산 야외예배 기념사진. 앞줄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박정백 선생, 이규철 전도사, 구연암, 강대원, 정응해(안겨 있는 아이는 정석암), 구정순, 정두선, 이분이, 임철조, 황분조, 김용한(훗날 교역자로 소평교회 시무) 집사, 구광본 선생, 김순자, 김명남(용강댁) 집사이다. 정재용 기자
1969년 봄 강동면 낙산동산 야외예배 기념사진. 앞줄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박정백 선생, 이규철 전도사, 구연암, 강대원, 정응해(안겨 있는 아이는 정석암), 구정순, 정두선, 이분이, 임철조, 황분조, 김용한(뒤에 교역자로 소평교회 시무) 집사, 구광본 선생, 김순자, 김명남(용강댁) 집사이다. 정재용 기자

임철조 집사는 스물한 살 나이에 아들 하나를 둔 청상과부가 됐다. 남편이 병으로 별세할 때 아들은 세 살이었다. 여자 혼자 몸으로 힘든 농사일을 쳐낸다는 것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지만 하늘나라 소망으로 예수님을 남편삼아 꿋꿋하게 살아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기도회에 빠지는 법이 없었다.

당시 소평교회에는 재미있는 전통 하나가 있었다. 수요일 기도회 때 대표기도는 누구라고 미리 정해 놓지 않고 아무나 먼저 시작하는 사람이 하게 돼 있었다. 사회자가 “어느 분이나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면 잠시 있다가 기도를 시작하면 됐다. 뜸을 들이는 것은 혹시 자신보다 더 성령이 강하게 이끄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서너 명이 동시에 기도를 시작할 때는 난감했다. 기도소리는 주파수 안 맞는 라디오처럼 여러 소리로 엉키고 교인들은 묵묵히 자연스럽게 정리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한꺼번에 일제히 그쳐버렸다. 이내 2회전이 시작됐다. 또 다시 그런 일이 있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안면몰수 작전으로 들어갔다. 차례대로 떨어져 나가고 성령이 가장 뜨겁게 역사한 사람의 승리로 끝났다. 강하게 임한 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한 번도 따져 묻는 사람이 없었다.

구정순 집사는 목소리가 굵어서 다른 사람을 이길 때가 많았다. 이분이 집사는 나직하게 시작하나 끈기가 있었다. 좀처럼 양보하지 않았다. 임철조 집사는 그 중간이었다. 모두가 그러했지만 임 집사의 대표기도는 청산유수였다.

임 집사는 남의 흉내를 잘 내서 주위를 웃겼다. 목소리도 행동도 흡사하게 하고 이야기를 구연동화 하듯 해서 누구든지 빨려들기 마련이었다. 그 중에 문둥이 이야기는 백미(白眉)였다.

왼편 집이 장산댁이다. 장산댁은 교회에서 학교 가는 길인 중앙로의 사거리 스리쿼터 시작점에 위치했으며 집 앞 울타리에는 높은 미루나무 두세 그루와 고염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장산댁에 이어 김루미 집사 댁, 맹포댁이 이어져 있었다. 멀리 보이는 산은 어래산이다. 정재용 기자
왼편 집이 장산댁이다. 장산댁은 교회에서 학교 가는 길인 중앙로의 사거리에 위치했으며 집 앞 울타리에는 높은 미루나무 두세 그루와 고염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장산댁에 이어 서호댁, 명포댁이 차례로 있었다. 멀리 보이는 산은 어래산이다. 정재용 기자

옛날 옛날에 어떤 나그네가 길로 길로 가다가 미역 줄기 하나를 발견했다. 나그네는 가뜩이나 입이 심심하던 차에 잘 됐다 싶어서 먼지를 털어내고 조금씩 찢어 먹기 시작했다. 짭조름한 맛이 입안을 맴돌고 바다 내음이 코를 자극했다.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나그네는 콧노래를 부르며 길을 걸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맞은편에서 한 남자가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 남자는 연신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무엇을 찾고 있는 듯 했다. 가까워져서 보니 그 남자는 문둥이였다. 지금은 한센병자로 불리지만 당시는 모두가 '문둥이'라고 불렀다. “경상도 보리문둥이”는 예사말이었고 “이 문둥아”는 친근감의 표시였다. 한센병자로 불리기 전에는 나환자(癩患者)라고 했다.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 가면 중앙공원에 천사장 미가엘이 창으로 나병(癩病)을 찌르고 있는 조형물의 구라탑(救癩塔)이 있다.

문둥이가 말했다. “혹시 길에 미역 한 줄기 떨어진 거 못 봤어요?” “예?” 다리에 분명히 붙어 있었는데 어디서 떨어졌는지…” 다리에는 진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그네는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어디 갔지?” 문둥이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나그네를 스치듯 지나 나그네가 온 길을 걸어갔다. 나그네는 더 이상 참을 길 없어 길가에 엎드려 꽥꽥 토하기 시작했다. 미역 줄기가 올라오고도 구토는 한참이나 계속됐다.

그러고 나니 속은 한결 편해졌으나 입이 텁텁하기 그지없었다. 떫은 감을 먹은 것 같기도 하고 보늬(밤의 속껍질) 안 벗긴 밤을 씹은 느낌이었다. 매운 고추장 있으면 한 숟갈 푹 떠서 먹고 싶었다. 밭에 고추라도 하나 따 먹어야겠다고 생각 했으나 봄이다보니 밭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얼마를 가다가 이번에는 마늘 한 조각이 토끼풀 위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그네는 너무 기쁜 나머지 소매에 쓱쓱 닦고는 바로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마늘 특유의 맛에 혀가 아리고 톡 쏘는 냄새에 답답하던 코가 뚫렸다. 입이 개운해진 나그네는 휘파람을 불며 걸었다.

그때였다. 어떤 사내가 남루를 펄럭이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사내도 문둥이였다. ‘웬 문둥이가 둘씩이나’ 생각하고 있는데 문둥이가 코를 킁킁거리며 물었다. “혹시 내 마늘 떨어진 거 못 봤어요? 킁” “예?” “내 콧구멍에 박아놓았던 마늘이 어디서 빠져버렸는지… 킁킁” ‘이런, 제기랄’ 문둥이는 부지런히 여기저기를 살피며 나그네를 지나갔다.

‘문둥이 시인’ 한하운(1921-1975)은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파랑새’ 전문) 라고 노래했다. 장산댁 임철조 집사는 82세로 별세했다. 천국에서 한하운 시인을 만나 꾸중은 안 들었을지 모르겠다. 구광본(75) 씨 내외는 지금 아들 집이 있는 경남 진영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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