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의 '백년'
문태준의 '백년'
  • 김채영 기자
  • 승인 2019.03.15 17:41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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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의 '백년'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빈 의자처럼 쓸쓸히 술을 마셨네

내가 그대에게 하는 말은 다 건네지 못한 후략의 말

그제는 하얀 앵두꽃이 와 내 곁에서 지고

오늘은 왕버들이 한 이랑 한 이랑의 새잎을 들고 푸르게 공중을 흔들어 보였네

단골 술집에 와 오늘 우연히 시렁에 쌓인 베개들을 올려보았네

연지처럼 붉은 실로 꼼꼼하게 바느질해놓은 百年이라는 글씨

저 百年을 함께 베고 살다 간 사랑은 누구였을까

병이 오고, 끙끙 앓고, 붉은 알몸으로도 뜨겁게 껴안자던 百年

등을 대고 나란히 눕던, 당신의 등을 쓰다듬던 그 百年이라는 말

강물처럼 누워 서로서로 흘러가자던 百年이라는 말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하루를 울었네

 

시집『그늘의 발달』문학과지성사. 2008.07.18

 

‘속수무책’은 이런 상황에 꼭 들어맞는 낱말 같다. 기어이 숨겨 놓은 통점까지 건드린다. 시 안에선 화자가 아프고 시 밖에선 내가 아프다. 사전에서 백년이란 단어를 찾아본다. ‘오랜 세월, 한평생’이라고 등재돼 있다. 그러니까 시인이 말하는 백은 열의 열 배에 해당하는 수 개념을 뛰어넘는 의미를 지닌다.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먼 미래, 그 너머에 있는 아득한 세월을 이야기 하고픈 것이겠다. 백년가약, 백년해로와 같은 사자성어가 만들어질 때만 해도 백년이란 시간은 가늠조차 할 수 없었으리라. 사랑하는 임과 함께 한 백년 살고 싶다던 노랫말이, 꿈인 줄로만 알았던 백세시대라는 용어가 현실이 된 요즘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가끔 시를 읽다보면 시인이 내 이야기를 대신하는 것처럼 착각할 때가 있다. 마치 사정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다는 듯이 점쟁이마냥 풀어헤쳐 놓는다. 독자인 나는 그것을 시적 공감대라 믿는다. 주로 가정사에 얽힌 것일수록 더 그렇다. 이 시도 마찬가지다. 낯설지 않은 첫 행에 발목이 묶여 서성거린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겹쳐 다음 행으로 건너가자니 마음이 무겁다. 부모님도 백년을 같이 살고자 부부인연을 맺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들은 고작 12년 함께 사셨다. 요즘의 의술이라면 병이랄 것도 없는 복막염이 화근이었다. 와병중인 엄마를 두고 동네 주막집 붙박이가 되어 술을 밥처럼 드시던 아버지 옆얼굴이 시 행간에 누워있다.

왜 하필이면 술집 시렁의 베개에 눈길이 닿았을까. 왜 하필이면 백년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을까. 베갯모의 백년은 시의 마중물이 되었다가 내 서정의 마중물로 확장된다. 시인은 남이 보지 않는 것을 봐야 하고, 남이 하지 않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배웠다. 장식이 없는 시를 쓰라고 했다. 수사법修辭法)을 동원하여 꾸미지 말라는 뜻이었다. 사연 자체가 시가 될 수 없으므로 감정을 극복해야 한다고, 시는 개인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개인을 넘어서야 감동을 줄 수 있다고 했다. 문태준 시인의 ‘백년’을 읽으며 기억 바닥에 깔려있는 창작이론을 되새겨본다. 이 시야말로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예정된 사별의 아픔이 고해성사처럼 스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