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㊶쥐들과의 전쟁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㊶쥐들과의 전쟁
  • 정재용 (엘레오스) 기자
  • 승인 2021.02.01 17: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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볏가리는 쥐들의 아지트
그들은 강했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낭만주의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1812~1889)이 지은 동화 중에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가 있다. 하멜른은 독일 서북부에 있는 브라운슈바이크 지방의 작은 도시이다. 어느 날 이 도시에 쥐떼가 몰려들었다. 집집마다 쥐덫을 놓고 고양이를 풀어 놓아도 막무가내였다. 점점 불어나는 쥐떼를 견디다 못한 시장은 “누구든지 쥐를 없애주는 사람에게는 금화 1천 냥을 주겠다”고 했다. 이때 큰 키에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사나이가 피리를 들고 나타나 도전했다. 사나이가 피리를 불며 거리를 걸어가자 여기저기서 쥐들이 쏟아져 나와 뒤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하멜른의 남쪽 성벽을 따라 흐르는 깊고 넓은 베저강으로 들어가 빠져 죽었다.

소평마을에도 쥐가 많았다. 사방이 논이다 보니 집쥐, 들쥐가 따로 없었다. 무논일 때는 개구리와 메뚜기 잡아먹고 논두렁콩 파먹던 쥐들이 가을이 되면 마을에 있던 쥐까지 논으로 몰려들어 추수를 했다. 참새는 참새 대로 이 논 저 논 저공으로 떼를 지어 날았다. 가을은 농부에게나 들짐승에게나 풍요의 계절이었다. 햅쌀은 하늘로부터 내리는 비와 이슬과 물과 햇빛과 바람에다 농부가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 빚어낸 ‘만나’였다.

벼 베기를 마치고나면 논둑마다 바가리 천지였다. 바가리는 '쥐구멍에 볕들 날'을 빼앗는 대신 지붕을 얹어주는 격이어서 추위와 빗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아줬다. 시간이 지나자 쥐들은 거처를 좁고 음습한 땅속에서 바가리로 옮겼다. 바가리 속은 오리털 이불마냥 따스한 볏짚에 밝고 쾌적해서 자고 일어나면 온몸이 개운했을 터였다. 시장기가 돌면 포도나무 아래 낮잠을 자던 여우가 고개를 쳐들고 포도를 따먹듯 벼이삭을 갉으면 됐다. 솔개에 쫓겨 혼비백산할 일도 없었다. 쥐구멍으로 벼이삭 물어 나를 필요도 없어진 쥐들은 아늑한 공간에서 맘껏 사랑을 나눴다.

1984년 2월 4일 산포댁 마당, 쥐가 숨을 곳은 많고 많았다. 정재용 기자
1984년 2월 4일 산포댁 마당, 쥐가 숨을 곳은 많고 많았다. 정재용 기자

농부는 농부대로 하루 속히 논보리 갈이를 끝내고 타작해야한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쳤다. 피땀 흘려 지은 알곡을 마냥 쥐 좋은 일만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바가리 실어 들이는 날은 쥐 가족에게는 날벼락이었다. 찬바람에 알몸을 드러낸 새끼들이 논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농부는 볏단을 타작 때까지 다시 마당에 쌓아 두었다. 그날 밤 쥐들은 농부의 집으로 집단 이주를 감행했다.

농부의 집은 별안간 쥐 천지가 됐다. 볏가리는 쥐의 아지트로, 볏단을 눕혀 쌓아올린 까닭에 바가리 때보다 한결 편했을 터였다. 뒤뜰 땅속에 묻어놓은 무를 갉아먹고 앤디가 쇼생크 교도소를 뚫듯 창고 바닥으로 구멍을 냈다. 창고 안에는 나락가마니, 고구마 포대, 쥐눈이콩 대야가 있었다. 농부는 밤송이를 쑤셔 넣어 쥐구멍을  막았다. 외양간 쥐는 소죽을 훔쳐먹다가 소가 누우면 뒷다리 곁에 붙어서 잠을 잤다.

강추위에 도랑물까지 얼어붙으면 쥐들은 부엌으로 몰려들었다. 쌀뜨물과 설거지 마친 물이 끊임없이 구미를 당기고 솥전은 구들목처럼 따뜻했다. 구정물통을 기웃거리다가 ‘물에 빠진 생쥐’는 목숨을 잃고 아궁이에 들어가서 잠을 자던 시궁쥐는 이튿날 새벽 불길을 뚫고 튀어 나왔다. 

초가삼간의 천장(天障)은 방바닥에 누워서 보면 사람의 갈비뼈처럼 서까래 천지였다. 사람들은 도배하기 쉽도록 천장에 철사로 격자(格子) 줄을 치고 그 위에 종이를 발라 평평하게 했다. 이를 ‘안장 한다’라고 했다. 겨울밤 안장 안은 쥐들의 놀이터였다. 불이 켜져 있는 동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하다가 불이 꺼지고 나면 축구를 하듯 우르르 몰려 다녔다. 막 잠이 들려던 소년은 방 빗자루를 거꾸로 들고 안장 여기저기를 두들겼으나 잠시뿐이었다.

고양이는 쥐와 낯이 익어서인지 잡을 생각을 안 했다. 늙은 쥐는 보란 듯이 어슬렁어슬렁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어쩌다 고양이가 달려들어도 쥐는 언제나 한 걸음 더 빨랐다. 볏가리는 쥐의 도피성이었다. 고양이 걸음은 갈수록 느려 터졌고 농부는 아내에게 “절대로 고양이에게 밥을 주지 말라” 화를 냈다. 쥐는 타작을 하고나서도 집안을 떠나지 않았다. 뒤주를 갉고 창고로 숨어 들어가 벼 가마니에 구멍을 냈다. 창고 바닥을 시멘트로 발라 놓으면 쥐는 주인이 잠시 문을 열어 놓은 틈을 이용하여 들어가거나 문 모서리를 갉아 틈을 내어 들어갔다.

쥐잡기 포스터. ‘질병 전염 흑사병, 양곡 피해 연간 200만석, 건물 파괴 가스 중독’이라는 글이 보인다.
쥐잡기 포스터. ‘질병 전염 흑사병, 양곡 피해 연간 200만석, 건물 파괴 가스 중독’이라는 글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텔레비전, 라디오는 날마다 쥐잡기를 종용했다. 학교에서는 가정통신문은 내고 아이들은 왼쪽 가슴에 ‘쥐를 잡자’ 리본을 달았다. ‘흉패(胸牌) 검사’를 해서 안 단 아이는 벌 청소를 하고 교실 게시판에는 쥐를 잡자 표어와 포스터가 붙었다. 마을 반상회에서는 쥐약을 무료로 제공했다. 물약이었다.

쥐약은 정한 날 정한 시각에 일제히 놓게 돼 있었다. 사전 며칠간은 미끼를 놓아 쥐들이 안심하고 먹게 하고, 디데이(D-day) 저녁이 되자 농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미끼로 쓰던 먹이에 쥐약을 버무렸다. 쥐가 죽고, 그 쥐를 먹은 고양이가 죽고, 아이들은 쥐꼬리를 잘라서 학교로 가져갔다. 오징어 다리를 잘라 불에 그을린 후 땅에 놓고 발바닥으로 비비면 쥐꼬리 대용품이 됐다. 들키면 종아리에 쥐꼬리 흔적이 나도록 맞았다.

쥐틀도 놓았다. 쥐구멍 근처나 길목에 쥐틀을 설치해 놓으면 미끼를 먹으려던 쥐가 철판을 밟는 순간 강철 톱니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쥐가 달라붙게 해서 잡는 찍찍이 쥐틀도 있었다. 어느 농부네 집은 나무판자로 쥐틀을 만들었다. 직사각형 통 안 깊숙이 미끼인 멸치가 매달려 있고 그리로 다가가는 길은 경사진 또 다른 나무판자였다. 쥐가 들어가면 무게에 의해서 판자가 내려앉고 동시에 판자를 지탱하고 있던 대나무침이 미끄러지면서 출입문이 닫혔다. ‘독 안에 든 쥐’는 이튿날 새벽에 쥐를 자루에 쏟아 부어 불 깡통 돌리듯 빙빙 돌려서 땅바닥에 내리쳐 죽였다. 이때 세차게 안 돌리면 쥐는 자루주둥이를 뚫고 도망가거나 돌리는 사람의 옷소매 안으로 파고들었다. 돌리다가 자루를 놓쳐 지붕 위로 던져 올리기도 했다. 가끔 족제비도 잡혔다.

문득 피리 부는 사나이가 그립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소평마을에서는 하멜른의 피리 소리도 빛을 잃었을 것 같다. 그 많은 쥐가 빠져 죽으려면 형산강 정도는 돼야겠는데 거기까지는 너무 멀고 마을 가까이는 폭 2~3m, 깊이 1m 정도 되는 실개천 수준의 ‘큰거랑’이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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