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동해 씨의 남가일몽(南柯一夢)
원동해 씨는 국영기업체에서 정년을 마치고 은퇴했다. 퇴직하고 얼마간은 꿈같은 시간이었다. 늦잠을 즐길 수 있고 점심엔 무얼 먹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부인이 알아서 해주기 때문이다. 용돈만 해도 그렇다 필요하면 말씀하라는 부인이 부처님처럼 보였다. 그동안 처자식을 부양하느라 애썼다고 보상 차원에서 하는 거라는 걸 모르는 원동해 씨가 아니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려 노인 복지회관에 등록을 했다. 아내한테 매일 만원만 달라 해서 받아 나온다. 복지관 구내식당의 식사비는 2.000원으로 저렴하고 먹을 만하다. 두어 명에게 대접해도 6.000원이면 된다. 자판기에 뽑아먹는 커피도 한잔에 200원이니 네댓 명에게 인심을 써도 1.000원이면 된다. 65세가 넘으니 지하철 표가 또한 공짜다. 담배를 피우지 않으니 그나마 아껴 쓰면 일만 원으로 하루를 쓸 수 있다. 복지관에서 원동해 씨는 옷도 깔끔하게 입고 매너도 좋아 인기가 있다. 원동해 씨와 라이벌 관계인 김 영감이 늘 신경 쓰인다. 부동산도 좀 있다 하고 돈도 제법 잘 써서 따르는 할배 할매들이 더러 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옛말이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다. 평소 원동해 씨에게 호감을 보이는 홍 여사에게 점심을 자주 산다는 소문이 들린다. 홍 여사 혼자만 데려가려면 응하지 않을 것 같으니 홍 여사와 함께 있는 사람들까지 데려가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지나가는 말이라도 같이 가자해도 따라갈 원동해 씨가 아니지만, 배가 아프다.
어느 날 복지관 휴게실에서 신문을 보는데 로또복권을 다루는 심층 기사가 실렸다. 돼지꿈을 꾸고 샀더니 당첨되었다느니 두꺼비 꿈이 좋다느니 조상 꿈이 좋다는 둥 그야말로 백가쟁명이다. 그렇잖아도 요즘 원동해 씨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자주 꿈에 나타나서 지난 주에 로또 복권을 한 장 사두었던 것이 생각나 확인도 할 겸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황금동입니다. ” 아내 음성이다.
“응 나요 책상에 지난주 사둔 복권이 있는데 찾아봐요. ”하니
잠깐만요 하며 부인이 책상 앞으로 이동하느라 밍기적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찾았어요.”하는 소리가 한참 후 들린다.
“한번 불러봐요” 하자 돋보기를 찾아야 한다면서 한참이 흘렀다.
“불러보세요.” 준비가 된 모양이다.
“알았어 그럼 부를 테니 잘 봐요" 하며 당첨 번호를 부르기 시작한다.
“13.14.17.32.41.42” 단숨에 부르자 그렇게 빨리 부르면 어쩌냐며 천천히 부르란다.
“알았어 천천히 부를게 13은 있어?”하자 있다고 한다.“ 다음 14. 17은 있어?” 하자 있다고 한다. 원동해 씨의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32는 있어?”
“예, 그것도 있어요.”
아니 그럼 이거 다 맞는 거 아냐? 원동해 씨의 가슴 뛰는 소리가 자기 귀로 들리는 듯하다.
“임자 천천히 잘 봐요.”
수화기 넘어 들려오는 마누라의 숨소리도 떨려온다.
“사십일 일은?” 목소리가 심하게 떨린다.
“41 있어요 그것도 있어요.” 재확인까지 한다.
이제 하나 남은 숫자 42가 문제다. 이것마저 맞는다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이다.
“42 있나 봐 봐 요.”
“예 그것도 있어요.”
일순 머리가 하얘진다.
“사사십 이 이가 확 확실해?”
“예 42 맞아요.”
원동해 씨 목소리가 떨리다 못해 더듬기까지 한다. 이게 꿈이 아닐까 봐 허벅지를 꼬집어도 보았지만 아픈 걸 보니 꿈은 아닌 모양이다. 오, 하느님, 부처님, 공자님, 옥황상제님, 일월성신님, 정녕 제게 이런 복을 주시는군요. 현직 때 눈 한번 딱 감으면 퇴직 후 편하게 살 수도 있었는데 그 유혹을 뿌리친 보상을 이렇게도 해주시옵니까?. 정녕 제가 814만 분의 1의 행운을 잡았단 말입니까?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하며 속으로 되뇌어 본다. 신문에는 이번 회 차는 두 사람이 당첨되어 당첨금액이 무려 68억 원이라고 나와 있다.
원동해 씨의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동안 신세를 졌던 사람들과 도움을 주고 싶은 사람들이 원동해 씨의 머릿속을 휙휙 지나간다. 가진 게 좀 있다고 거들먹거리던 김 영감도 발아래로 보인다. 원동해 씨의 귀에 탄성 소리인 듯 마누라의 소리가 들려 퍼득 정신이 돌아온다.
“여보 우리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요.?” 마누라가 떨려 진정이 되지 않는 눈치다.
“임자! 내가 바로 집에 갈 테니 아무한테도 알리지 말고 복권 잘 가지고 있어요.”하자
“복권은 당신이 갖고 있잖아요” 한다. 아니 이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인가?.
“임자 지금 복권 가지고 얘기하는 거 아니야?” 하고 반문하자. 책상 위에 있는 신문 보고 하는 소리란다. 두 사람은 지금 신문에 난 복권 일등 번호를 서로 얘기하고 있었다. 부인은 남편이 복권 가지고 당첨 번호를 부르는 줄 알았고 남편은 집에 두고 온 복권을 부인이 보고 부르는 줄 알았다. 원동해 씨의 꿈이 남가일몽이 되는 순간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소풍 가서 보물 찾기를 해도 늘 꼴찌요 지금까지 경품 뽑기에도 당첨된 적이 없었는데 무슨 그런 대 복이 나한테 오려고? 스스로 위로해본다.
잠깐 동안이지만 68억 원을 가져보았다. 그 짧은 시간 가슴이 두근거리고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머리가 하얘져 혼란을 느꼈다. 돈이 너무 많아도 불편할 것 같았다. 갑자기 그런 큰돈이 생기면 아마 제 명에 못 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일등 당첨이 아니란 걸 알고는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지고 홀가분함을 느낀다. 원동해 씨의 자조적인 넋두리가 이어진다. 학창 시절 친구들이 내 이름을 가지고 '원통해' 라고 놀렸는데 그때 이름을 '원일등' 으로 바꿀 껄 헛! 헛! 헛! 웃음소리가 허공에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