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에세이 7] 카라바조의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성화에세이 7] 카라바조의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 이동백 기자
  • 승인 2021.01.2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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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9-10, 유화,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1609-10, 유화,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칼집에서 빼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 일어나서 소리 지르며, 블레셋 사람들을 쫓아 가이와 에그론 성문까지 이르렀고, 블레셋 사람들의 부상자들은 사아라임 가는 길에서부터 가드와 에그론까지 엎드려졌더라.”(사무엘기 상권 17장 51절~52절)

빛은 오히려 어둠을 깊게 만들어버린다. 다윗의 상체는 어둠을 가르고, 골리앗의 머리는 가늠할 수 없는 깊은 어둠에 둥둥 떠 있다. 삶은 서고, 죽음은 떴다. 삶과 죽음을 갈라놓은 어둠의 질감은 호젓하면서도 엄혹하다.

카라바조의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은 물맷돌 하나로 적장을 처단한 강단(剛斷) 있는 전사가 아니다. 강골의 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소년 목동의 모습 그대로이다. 앳된 미소년이다. 적장의 머리를 움켜쥔 다윗에게서 승리자의 충만한 기쁨을 찾을 수 없다. 적의도 없고, 분노도 없다. 내리감은 눈으로 골리앗을 바라보는 다윗의 얼굴에는 연민의 정이 가득하다. 눈물을 곧장 쏟아낼 것만도 같다.

“당신, 왜 그러고 있소? 그 용맹은 다 어디로 갔소?”

다윗은 골리앗에게 한 마디 조용히 건넸으리라. 그 목소리는 퍽 쓸쓸하고 연민에 차서 이전에 품었던 적의와 분노는 이미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버린 것만 같다.

이처럼 생사를 두고 다투던 긴장감은 이미 이 도상에서 살필 수가 없다. 사투를 보여주는 것은 다윗이 움켜쥔 칼인데, 그 칼마저도 적장의 목을 친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다윗의 무릎에 빗긴 칼날에는 한 줄기 싸늘한 빛이 머물 뿐이다. 골리앗이 흘린 피는 골리앗의 머리를 움켜잡은 다윗의 손에 어렴풋이 남았을 뿐, 칼에는 피의 얼룩마저 남아 있지 않다.

이 그림 속 다윗의 칼은 이미 살육의 칼이 아니다. 서슬 푸르던 칼날의 이미지는 정화되어 한 줄기 빛으로 남은 칼이다. 그래서일까. 이 칼날에는 다음과 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시편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예수가 사탄을 물리쳤듯이 겸손으로 교만을 물리쳐야 한다.”

이것은 다윗에게 바친 카라바조의 헌사처럼 느껴지지만, 교만했던 한때를 회개한 다윗의 삶을 압축한 것인 듯하다.

어둠에 둥둥 뜬 골리앗의 머리는 실은 다윗의 손에 잡혀 있다. 머리카락이 어둠에 묻혀서 그걸 확인하기 어려울 뿐이다. 그래서 그 머리는 어둠에 잠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골리앗은 이마에 큰 상처를 입고 이미 넋을 놓아버린 처지여서 어둠에 잠긴 얼굴은 납덩이처럼 창백하다. 희미한 빛이 지나가는 입술은 탄력을 잃었고, 눈도 힘이 빠졌다. 한쪽은 내리깔리고, 한쪽은 떴다. 생사의 균형이 깨어진 탓이리라.

카라바조는 골리앗의 데드마스크에 자신의 얼굴을 남겨 놓았다. 이는 아이러니인데, 어인 까닭인가? 힘만 믿고 날뛰다가 허무하게 무너진 골리앗처럼 자신의 알량한 천재성을 미처 다스리지 못한 자신에 대한 참회 때문인가. 골리앗은 카라바조의 반면교사인가?

참회하지 않은 교만은 바벨탑과 같아서 무너지기 쉽고, 겸손은 멀지만 죽음을 극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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