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끝난다면-그곳에 가고 싶다-6. 추억 속 옛집
코로나가 끝난다면-그곳에 가고 싶다-6. 추억 속 옛집
  • 우남희
  • 승인 2021.02.1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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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키운 집
픽사베이
픽사베이

그 집에 가고 싶다. 그 집은 푸른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그림 같은 집도 아니고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언덕 위의 하얀 집도 아니다. 하루 일정을 비우고 가야 할 만큼 원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걸어서 십분 이내로 갈 수 있는 곳에 있다. 몇 번 기웃거리긴 했으나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팬데믹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코로나19 확진자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 집은 대학 4학년 때 남의 손에 넘어갔다. 살기 위해 매입했을 텐데 살림은커녕 입주하지 않았다. 수십 년째 방치되더니 세월 앞에 장사가 없듯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담장이 무너지고 마당에는 잡초가 우거져 결국 폐허로 변했다.

기린처럼 긴 골목 초입에서 마당을 지나 마루까지 50여 미터는 족히 되리라. 그 골목의 끝인 대문 앞에 감나무 한 그루가 있다. 늦가을이면 노을빛 전구를 달아 집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하는 나무다. 대문으로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나타난다. 넓은 평수에 비해 집은 아담하다. 남향인 본채를 중심으로 동향東向의 아래채가 있고 부엌 앞에는 장독대가 있다. 시골집 마당의 장독대 앞에는 으레 맨드라미, 봉숭아를 심은 꽃밭이 있을 거라 짐작하겠지만 그 집은 그렇게 넓으면서도 없었다. 앞마당 담장 아래 작은 꽃밭에만 몇 종류의 화초들이 있을 뿐, 나머지는 마당 그 자체로 두었다. 아래채와 장독대 사이에 뒤꼍으로 가는 뒷문이 있다. 뒷문을 열면 웬만한 집 마당 크기의 터앝과 꽃밭, 공동우물이 있는 것이 특이하다면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터앝에는 고추, 가지, 호박을 비롯한 갖가지 채소들이 심어져 있고, 꽃밭에는 해바라기, 분꽃, 과꽃, 접시꽃, 국화 등을 비롯한 웬만한 꽃들을 볼 수 있다. 그 꽃들 중 어제 본 듯한 꽃이 있다. 나팔꽃이다. 나팔꽃은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꽃이 아닌가 싶다. 꽃밭에만 피는 것이 아니라 밭머리나 공터 등 어디서나 지천으로 피는 꽃이기 때문이다. 귀할수록 대접받는 것이 인지상정이듯 꽃에게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저마다 좋아하는 꽃이 있다. 계절의 여왕인 5월을 대표하는 꽃인 장미를 좋아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천진난만하다는 꽃말을 지닌 프리지아를 좋아하는 이도, 오상고절로 불리는 국화를 좋아하는 이도 있다. 허나 나는 나팔꽃을 좋아한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뒷문을 열고 나가곤 했다. 담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핀 나팔꽃을 보면서 별천지가 다름 아닌 이곳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예나 지금이나 그 집을 생각하면 깨끗하게 비질한 마당, 빨랫줄에 널어놓은 하얀 교복 위로 쏟아져 내리는 마알간 햇살, 뒤꼍에 흐드러지게 핀 나팔꽃, 책상을 대신한 두레상을 마루에 펴놓고 공부하는 여학생의 모습과 같은 몇 장의 정물화가 눈앞에 펼쳐진다.

‘세월이 약이다’, ‘나이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은 경험을 통해서 얻어낸 진리 같은 말이다.

허나 세월이 약이라 하더라도 추억을 박멸하지는 못한다. 40여 년의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그 집을 생각하면 몇 장의 그 정물화가 떠오르니 말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지만 얼굴도 모르는 이가 가꾼 글밭을 걷다가, 벗들과의 대화의 마당에서 불현 듯 그 때 그 장면이 떠오르니 그 말도 무색하다.

누구에게나 그리운 곳이 있다. 코로나가 사라지면 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너머의 옛집은 지금도, 먼 훗날에도 여전히 가고 싶은 곳, 그리운 곳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