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손이 한 일 왼손이 모르게 하라
오른손이 한 일 왼손이 모르게 하라
  • 김채영 기자
  • 승인 2022.03.09 16:09
  •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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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워서 남 주자
벌어서 남 주자

 

2022년 3월 9일 오늘은 대한민국의 제20대 대통령을 뽑는 날이다. 날씨가 일조하려는 듯 창으로 들어오는 봄햇살이 눈부시다. 잠자리에서 서둘러 일어나 여느 때처럼 컴퓨터부터 열었다. “벌어서 남 주자, 113억 기부하고 떠난 99세 의사” 조선일보 단독이라는 고딕체 표제어에 이끌려 기사를 클릭한다.

무릇 ‘위대하다’는 형용사는 이럴 때 사용해야 할까. 한국전쟁 때 월남하여 일평생 환자를 돌보며 검소하게 사신 분, 지난 6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 고(故) 장응복(99)씨 이야기다. 평생 모은 돈을 한동대학교에 기부하고 조용히 떠났다는 보도가 아직 눈곱에 붙어있는 잠을 확 밀어낸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는데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 구절처럼 자신의 생전엔 기부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못하게 했단다. 한동대 표어 ‘배워서 남 주자’에 감명을 받아 ‘벌어서 남 주자’는 말로 변용하여 자신의 소신대로 살다가 떠난 것이다. 부전자전인가. 아버지의 뜻에 흔쾌히 따랐다는 세 아들도 훌륭하다.

이런 사례는 흔한 미담이 아니다. 그러니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아름다운 귀감 앞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이 복잡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다. 배워서 남 주는 일이든 벌어서 남 주는 일이든 말은 쉽다. 하지만 그것을 실천하고 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같은 맥락인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관용구도 마찬가지다. "게으른 말이 짐을 탐한다"는 것이나 "아흔아홉 섬의 곡식을 가진 사람이 한 섬 가진 사람의 것을 마저 빼앗으려 한다"는 속담은 모두 과한 욕심을 일컫는 것이다. 오늘의 욕심이 내일의 화를 초래할 수도 있는데 안중에 없는 듯 신경 안 쓴다.

변명 같지만 나도 버리지 못하는 욕심이 하나 있다. 배움에 대한 갈망이다. 흥미를 끄는 문학 강좌가 있으면 어디든 찾아간다. 차멀미는 물론 길눈이 어두워 고생하면서도 그런 고생쯤은 행복하게 감수한다. 월급쟁이 남편의 봉급을 축내는 공부도 서슴지 않고 했었다. 배워서 남 주자는 고귀한 생각 따위는 보통사람인 내 의식 속에 없었다. 남편은 배워서 남 주어야한다는 말을 놀리듯이 빗대어 말하곤 한다. 글 좀 봐달라는 부탁을 거절 못해 고생하는 걸 지켜보기 때문이다. 거절하면 인심 잃고 사람 잃을까 봐서다. 선천적인 오지랖일 수도 있다. 어느 순간부터 ‘이건 아니다’라는 한계점에 부닥쳤다. 단순히 선의로 시작된 일이 불편으로 다가온 것이다.

부탁을 하는 입장에서는 사소하거나 간단한 문제로 치부될 수 있다. “나 하나인데 뭐” 가볍게 생각하기 십상이다. 어떤 종류 어떤 성격의 글이든 그 사람이 살아온 역사와 가치관 그리고 정서가 배여 있기에 제3자가 미칠 수 없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 기계적인 교정이 아닌 문장의 첨삭은 전문가가 아니라서 쉽지 않다. 컴퓨터 앞에 장시간 앉아 타인의 정서에 끼어든 결과는 의미 없는 노동만 남았다. 내 작품 쓰기보다 훨씬 어렵다는 이야기다. 어깨통증이 와서 병원에 갔다가 컴퓨터가 한 몫을 한다는 충고를 들었다. 배워서 남 주는 일, 벌어서 남 주는 일,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일, 다 좋다. 하지만 아무나 위대한 사람이 되긴 어렵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그래서 오늘 읽은 기사 한 꼭지가 더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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