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탐방] 칠곡군 지천면의 오지 마을 '백운리'와 '황학리'
[동네 탐방] 칠곡군 지천면의 오지 마을 '백운리'와 '황학리'
  • 유무근 기자
  • 승인 2021.01.07 10: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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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계마을엔 흉년 때 스님의 저주로 천 년간 고립되었다는 전설
115년 역사 지닌 황학교회, 설봉스님 도예 전시장 등 볼 곳 많아

 

칠곡군 지천면 백운리 예계마을 전경. 고려시대에는 200호의 큰 마을로 정미소, 양조장, 쉼터 주막도 있었다고 한다. 계곡에서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들이면 과거에 합격한다는 전설이 '예계마을'의 전설로 전해져 오고 있다.  유무근 기자

사찰에 불이 나 큰스님이 소사(燒死)한 전설을 안은 마을이 있다. 스님은 숨을 거두며 “이 마을이 저주를 받아 천 년 동안 잠들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 마을은 당시 흉년으로 민심이 메말라 있었는데, 천 년 동안 지역 발전은 물론이고 훌륭한 인물도 나오지 않을 것을  에언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경북 칠곡군 지천면 백운리 마을 일대에 전해온다. 

백운리(이장 박수희)는 칠곡군 지천면사무소에서 북쪽으로 7km 정도 떨어진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촌이다.

이 마을은 면사무소에서 북쪽으로 7km 정도 떨어진 오지이며,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3개의 자연 부락로 형성되어 있다. '예계', '질부', '행화'라는 3개의 자연 마을을 행정상 ’백운리‘라 칭한다. 

질부마을은 고려시대 도요지(陶窯地)로서 도공들이 모여 살았던 마을이다. 질그릇이 와전되어 질붓이 되었다가 질부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행화마을은 살구나무가 많아 살구꽃을 뜻하는 '행화'(杏花)라고 부르게 되었다. 행화촌으로 통하기도 한다.

예계마을은 산과 계곡이 많아 물을 가두어 배를 정박해 놓은 지형이라 해서 '행주형 터'라고도 했다. 마을의 번영을 염원하며 배 모양의 솟대를 만들어 세우기도 하였다.  유무근 기자

예계마을은 지천면의 북쪽 해발 200m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신라 때부터 상주로 가는 길목에서 지친 말(馬)을 바꿔 타는 역촌이 있었다. 조선 후기 한양 과거 길에 나선 선비들이 이곳에 유숙하면서 계곡에서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다하면 과거에 합격한다고 한 뒤로 '예계(禮溪)'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경주~예계~상주를 거쳐 한양으로 가는 길에 있는 역촌 중 한 곳이었다. 옛날엔 정미소, 양조장과 쉼터 주막도 있었다. 당시 가구 수는 80여 호였으나, 고려 때에는 200호의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예계마을 주변에는 산과 계곡이 많아 물이 모이는 지형이라 '행주형 터'라고 칭하기도 한다. 물을 가두고 배를 정박시켜 마을의 번영을 염원하기 위해 배 형상의 솟대를 만들어 세우기도 했다. 이 일대에서 신라 불교 중흥기의 사찰 흔적과 탑돌 모양의 주춧돌이 여럿 발견되었다. 탑돌들은 방치되어 오다 근년(近年)에 도굴되어 버렸다고 마을 어른들은 아쉬워한다. 

이 마을 태생이며 유래에 밝은 이권화(70) 씨는 "이차돈이 순교할 무렵인 불교 중흥기에 백운산 중턱에 있는 큰 절로 주지가 처음 부임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스님을 공양해야 했으나 가뭄과 흉년으로 민심이 삭막해져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후 절에 큰불이 났고, 스님이 소사(燒死)하며 저주를 내렸다. 이후 이 인근 마을들은 산촌 오지로 변했고 문명의 혜택이 거의 미치지 않아 발전도 없었고 인물도 나타나질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도 칠곡군 오지마을로 이곳 백운리와 황학리(이장 김관식)를 꼽는다. 2017년 칠곡군 오지마을 탐방의 일환으로 '군수와의 대담'도 이곳에서 했었다. 천 년이 지난 1980년대 후반부터 이 마을에 판·검사와 장군이 나오고 천석꾼, 만석꾼과 사업가가 나타나기도 했다. 스님의 사건과 무관하지는 않다는 후문이다. 기도를 일상으로 하는 사람들과 원수지면 해(害)를 입는다는 속설이 있다. 그들은 영(靈)의 세계를 넘나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천면 황학리 수정마을에는 115년 역사를 가진 황학교회가 있다. 유무근 기자

 

지천면 황학리 수정마을에는 115년을 이어 오는 황학교회(목사 윤일권)가 있는데 신자가 열 명이 채 안 된다. 산촌이라 노년층이고 가구 수가 적기 때문이다. 1905년 일제 강점기에 설립한 이 교회에 이철순 목사, 은동철 목사 다음으로 윤 목사가 왔으며, 부임한 지 20년이 되었다. 울릉도가 고향인 윤 목사는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이장직으로도 봉사했다. 그는 국가 근대화에 기독교의 기여도가 크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교단 목사다. 

윤 목사는 "130년 전 외국 문화를 처음 들여온 사람이 선교사들이다. 그분들이 일생을 바쳐 이국땅에서 풍토병에 시달려가며 복음 선교는 물론이고 선진국의 문화도 함께 들여와, 학교도 세우고 병원도 세우고 교회도 세웠다. 또 화장실 문화도 바꾸고 삶의 문화와 질을 바꾸는데 기여했다. 그들의 삶은 희생 그 자체였다. 역사 속에서 불교계도 많은 기여를 해 왔지만, 삶의 질 향상과 보릿고개를 넘긴 것도 주한 선교사의 가교 역할과 기독교 문화가 바탕이 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어서 "추수감사절이나 기념일 예배 때면 외부 성도가 와 교회 분위기가 활기에 ㅠ넘치기도 했다. 요즘은 코로나19 사태로 교우들이 모이기가 힘이 든다. 이 난관이 하루빨리 지나가도록 기도에 매진하고 있다. 교회는 전쟁이 나도 예배를 드렸는데, 규제로 인하여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생동감 있는 박식한 설교로 정평이 나 있다. 교회 인근엔 300년 된 당나무가 교회 역사를 지키고 있는 듯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300년 된 당나무가 황학리 수정마을 황학교회 입구에 서 있다.  유무근 기자

 

2007년 백운리와 원 황학리에 923번 도로가 개통되기 전만 하더라도 이곳은 산골 오지로 낙후되어 있었다. 꼬부랑 비포장 길에 하루 세 번 이용할 수 있는 0번 버스가 먼지를 몰고 정차(停車)하면 그 먼지를 그대로 덮어써야 했고, 비가 온 뒤면 웅덩이가 생겨 흙탕물 세례도 감수해야만 했다. 지금은 원 황학리와 황학리, 백운리는 산골 마을의 청정지역으로 발전되어 전원주택지로 주목받고 있다. 923번 도로를 따라가면 곧 가산 IC로 연결된다. 중간 도로변으로 관광지도 있다. '달서지' 둘레길이 아름답게 조성되었고, 착시현상으로 오르막길이 내리막으로 보이는 요술 고개를 끼고, 4km 이내에 외지 손님들이 자주 찾는 미나리 농원도 두 곳 있다.

토향암 흙내음 도예원 입구. 설봉스님은 단독 수작업을 함으로써 작품 가치를 차별화하고 있다.  유무근 기자

인근에 설봉스님이 손수 빚는 ‘토향암 흙내음 도예원’ 사찰 전시장도 있다. 공정 과정은 크게 6단계로 나누어져 있으나, 스님은 작품의 순수성을 고려하여 단독으로 수작업함으로써 작품 가치가 남다른 인정을 받고 있다. 이 전시장에는 일본인 수집가가 작품 4점에 10억 원(약 1억 엔)을 주겠다며 간청해도 안 팔았다는 작품들도 전시되어 있다. 이 인근에는 전설을 담은 낙화담(落花潭)과 스키 동호인들의 수상스키 묘기를 관람할 수 있는 ‘지천 수상랜드’도 있다.

낙화담 아래 수상랜드에서 동호인들이 수상스키를 즐기고 있다.  유무근 기자

산골로 알고 있던 강원도 오지에도 전철이 놓이고 관광객이 붐벼 지금은 수도권이 되었듯이, 지천면 황학리와 백운리 마을도 농촌 안에서 도시로 발전되는 단계에 있다. 이곳에서 8km 지점에 경부선 신동역이 있고, 남쪽 8km 지점에 동명 주차장이 있다. 동명에는 시내버스 노선이 많다. 남쪽 8km 지점에는 지상철인 3호선 경대병원역(종점)이 있다. 의료 시설로는 동명 쪽으로 칠곡 경대병원. 가톨릭병원. 보건대학병원 등이 있고, 왜관 쪽으로 왜관병원에 응급실이 개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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