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떠나는 성지순례] 한국 천주교 전파의 요람, 충북 제천 ‘배론 성지’
[사진으로 떠나는 성지순례] 한국 천주교 전파의 요람, 충북 제천 ‘배론 성지’
  • 강효금 기자
  • 승인 2020.12.29 17: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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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론 성지 연못과 예수상.   이성호 작가
배론 성지 연못과 예수상.    이성호 작가

 

충북 제천시 봉양읍에 자리한 배론성지는 원주교구에 유일한 성지다. ‘배론’이라는 이름은 지형에서 유래된 것으로, 깊은 계곡이 마치 배의 밑바닥 같다고 해서 주론(舟獠) 또는 배론이라 불렀다.

배론 성지는 한국 천주교 전파의 산실이며,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박해를 피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많은 천주교인들이 이곳으로 숨어들었다. 사람들의 눈을 돌리기 위해 옹기를 구워 팔며, 자연스레 교우들끼리 연락을 취하고 모임을 가질 수 있었다.

 

황사영이 숨어지냈던 토굴. 그는 이 어둑한 토굴 속에서 등잔불에 의지한 채 가는 붓글씨로 길이 62㎝, 너비 38㎝의 명주(明紬)에다 1만3384자를 써 내려갔다.   이성호 작가
황사영이 숨어지냈던 토굴. 그는 이 어둑한 토굴 속에서 등잔불에 의지한 채 가는 붓글씨로 길이 62㎝, 너비 38㎝의 명주(明紬)에다 1만3384자를 써 내려갔다. 이성호 작가

 

황사영 백서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사람의 눈을 피해 서울 곳곳을 떠돌던 황사영도 1801년 음력 2월, 배론으로 거처를 옮겼다. 교우들은 그를 피신시키기 위해 지하에 굴을 파고, 그 위를 옹기로 덮었다. 그해 8월, 그는 자신에게 세례를 준 주문모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격분한 그는 작은 토굴 속에서 주문모 신부의 입국부터 교회의 사정, 박해의 전말과 순교자들의 이야기, 조선이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도록 정부를 압박하기 위한 방안 등을 하얀 비단에 적어 청나라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전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는 도중에 발각되고 만다. 바로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황사영 동상. 그가 꿈꾸던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순교자임에도 아직 논란의 여지를 남기며 복자품에 오르지 못한 황사영을 보며, 국가란 무엇이며 종교는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성호 작가
황사영 동상. 그가 꿈꾸던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순교자임에도 아직 논란의 여지를 남기며 복자품에 오르지 못한 황사영을 보며, 국가란 무엇이며 종교는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성호 작가

 

한국 최초의 신학교 ‘성 요셉 신학교'

1831년에 조선 교구가 설정되며 파리 외방 전교회가 그 임무를 맡게 되었다.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은 1836년 조선에 들어오자마자 신학생들을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그런데 여러 가지 힘든 문제가 발생하며, 이 땅에 신학교를 세워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당시 교우만 백여 가구가 될 정도로 신자들이 많았던 배론에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신학교가 세워졌다.

메스트르 신부는 1843년부터 배론에 와 살던 장주기의 초가집을 빌려 1855년 초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두 신부는 신학생을 뽑아 교육시키고, 교리서의 번역과 '라틴말-한국어-한문' 사전을 만들기도 했다. ‘성 요셉 신학교’는 처음으로 근대적인 교육과정이 개설된 학교였다.

 

신학당 터임을 알려주는 십자가. 신학교에서는 수사학, 철학, 신학을 가르치고 배웠다. 당시 신학생들은 설립직후 6명, 1859년에 7명, 1863년에는 10명이었는데 이들은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김 사도 요한, 유 안드레아, 권요한을 비롯하여 박 필립보, 이 토마스 등이었다.   이성호 작가
신학당 터임을 알려주는 십자가. 신학교에서는 수사학, 철학, 신학을 가르치고 배웠다. 당시 신학생들은 설립 직후 6명, 1859년에 7명, 1863년에는 10명이었는데 이들은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김 사도 요한, 유 안드레아, 권 요한을 비롯하여 박 필립보, 이 토마스 등이었다.   이성호 작가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묘소. 그는 주요 교리와 기도문을 가사체로 노래한 천주가사를 편찬하고, 다블뤼 주교를 도와 한문으로 된 교리서와 기도문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완성했다.  이성호 작가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무덤. 그는 주요 교리와 기도문을 가사체로 노래한 천주가사를 편찬하고, 다블뤼 주교를 도와 한문으로 된 교리서와 기도문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완성했다.   이성호 작가

 

길 위의 사제,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

1836년 2월 6일 열다섯 살의 최양업은 한국인 첫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뒤를 이어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방제, 김대건과 함께 그해 12월 3일 그는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 최양업은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마레스카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두 번째 한국인 사제로, 그의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최양업 신부는 1849년 12월 압록강을 넘어 십삼 년 만에 귀국한다. 1850년 1월 서울에 도착한 최양업 신부는 다블뤼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집전하는 것으로 사제로서의 성무를 시작했다. 이후 잠시도 쉬지 않고 교우촌 순방에 들어갔다.

최양업 신부가 일 년 중 순방해야 할 교우촌은 전체 교우촌의 약 70%에 해당하는 120여 곳으로, 해마다 2,800여 킬로미터를 걸어야 했다. 십이 년간 해마다 7000여 리를 걸어 교우촌을 순방한 그는 과로와 장티푸스가 겹쳐 경북 문경 인근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최양업 신부의 유해는 훗날 배론으로 옮겨 안장되었다.

 

누군가는 길을 내고, 누군가는 그 뒤를 이어 길을 닦는다. 김대건 신부는 사제로 짧은 일생을 순교로 마감했고, 최양업 신부는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세례를 베풀고 성사를 주며 하느님께로 가는 길로 인도했다.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그이의 발길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성호 작가
누군가는 길을 내고, 누군가는 그 뒤를 이어 길을 닦는다. 김대건 신부는 사제로 짧은 일생을 순교로 마감했고, 최양업 신부는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세례를 베풀고 성사를 주며 하느님께로 가는 길로 인도했다.    이성호 작가

 

이 기사의 사진은 이성호 작가가 제공해 주었습니다.

 

 

이성호 사진작가는

1962년生. 1988년 영남대학교 졸업. 2020년 계명대학교 대학원 미디어아트학과 재학중.

현대사진영상학회원. 한국사진학회원. 한국사진작가협회원. 현대사진연구회 회장

현 대구광역시 남구청 도시창조국장

<개인전>

2020 사라져가는 풍경, 정미소-slow city 함창창작소-상주

2019 가톨릭성지-1898갤러리-서울/ DCU갤러리-대구

2018 정미소프로젝트-예술발전소-대구(2018대구사진비엔날레)

2017 정미소프로젝트-대심리복합문화공간-예천

2016 空-봉산문화회관-대구

2015 空-갤러리now-서울

2012 청도유등축제 초대전-청도

<출판>

가톨릭성지-눈빛출판사-한국사진가100선 #61

<수상>

2020 부산국제사진제 포토폴리오 리뷰 최우수상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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