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 에세이 3] 렘브란트의 '아브라함의 제사'
[성화 에세이 3] 렘브란트의 '아브라함의 제사'
  • 이동백 기자
  • 승인 2020.12.2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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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5년, 유화,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
1635년, 유화,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세기 22장 10~12절)

모리아 땅으로 가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의 한 산으로 올라가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려 놓은 뒤, 아들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아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는 찰나에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생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하였다.

하나님의 이 메시지를 렘브란트는 그림으로 재현시켰다. 그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순간을 드라마틱하게 포착하였다. 칼을 들어 아들의 목을 치려는 아브라함의 손목을 천사가 낚아챈다. 얼떨결에 아브라함은 칼을 놓치고 만다. 반전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천사는 손을 들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고개를 돌려 천사를 쳐다보는 아브라함은 순간적으로 놀란다. 놀라는 아브라함의 표정 속에는 안도감이 배어 있다. 칼을 들었던 손을 보라. 펴다시피 한 손은 칼을 놓치는 손이라기보다 칼을 버리는 손이지 않는가? 아브라함도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아버지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왼손은 여호와의 뜻을 따르는 손이다. 이삭의 얼굴을 왁살스럽게 움켜잡은 손은 아브라함의 뜻이 강고함을 역력하게 보여준다. 이는 이삭의 목을 치겠다는 아브라함의 의지가 흔들리지 않았다는 암시이다.

렘브란트는 영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닌 아브라함의 내면을 꿰뚫어 본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아브라함과 아버지로서의 아브라함을 한 화폭에 담아낸 것이다.

하나님과 이삭, 의지와 안도 사이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또 다른 음성을 듣고 있었으리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세기 12장 2절)

아버지의 명령을 좇아 손을 결박당한 채 뒤로 쓰러진 이삭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번제할 양이 어디 있느냐고 의심하던 이삭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 그림 속의 이삭은 번제물로 들여지는 자신을 겸허하게 받아들인 자세이다. 죽음에 저항하는 흔적이 없다. 저항하는 이삭이라면 몸을 비틀거나 발버둥이라도 쳐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삭은 다소곳하기 그지없다. 그림 속에는 번제의 순간을 경건하게 기다리는 이삭이 있을 뿐이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장작더미 위에 누운 이삭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에게 순종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을 본다.

너무나 인간적이었던 다윗, 오로지 영적이었던 아브라함, 얼핏 보면 두 사람이 걸어간 길은 다르다. 그러나 그들이 가슴에 지닌 것은 사랑이었다. 하나는 반역한 아들에 대한 사랑이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었다.

이래서 사랑은 하늘에서나 땅에서 영원하고 아름다운 가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