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㊴찬바람 뚫고 메리 크리스마스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㊴찬바람 뚫고 메리 크리스마스
  • 정재용 (엘레오스) 기자
  • 승인 2020.12.21 17: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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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전야 발표회는 마을 전체 행사
선물 받아가는 산타클로스

우리나라의 성탄절(聖誕節)은 1945년 해방 이후 들어선 미군정(美軍政)에 의해 그해 10월 법정 공휴일로 지정됐다. 공식 명칭은 ‘기독탄신일’이었으나 ‘크리스마스'(Christmas)로 널리 불렸다. 학교는 성탄절을 이삼일 앞두고 겨울방학에 들어가고 어머니는 부엌을 들락거리는 아이들 때문에 쉴 새 없이 군것질거리를 만들어내야 했다. 그 첫 메뉴가 동지(冬至)팥죽이었다.

성탄절 분위기는 라디오, 텔레비전을 틀면 흘러나오는 징글벨, 루돌프 사슴 코,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등 캐럴(carol)과 더불어 시작됐다. 기상캐스터는 화이트크리스마스 예측으로 설명이 길었다. 흥겨운 분위기는 신정, 구정, 정월대보름, 이월까지 이어졌다.

교회는 성탄발표회 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순서와 배역은 12월 첫 주일에 발표됐다. 그때부터 어른 저녁 예배가 있는 수요일과 주일을 빼고는 매일 저녁 예배당에 모여서 연습을 했다. 레퍼토리는 뻔했으나 출연자가 다르니 어쩔 수 없었다. 유치부부터 유년부, 소년부, 중고등부로 이어지는 순서였다.

인사말씀은 늘 유치부 차지였다. 유년부의 요절(要節, 성경구절) 암송, 여자 아이들의 무용, 중고등부의 연극이었다. 성탄절이 가까워지면 노래 연습도 같이 하고 발표회 하루 전에는 총(總)연습을 했다. 교사들은 수고비 한 푼 없고, 아이들은 간식 하나 안 주는데도 열성을 다 해 가르치고 기쁨으로 배웠다. 칼바람에 창문이 떨고 온기라고는 장작 난로 하나가 고작이었다. 무쇠 난로는 가끔 연기 역류로 “이러다 너구리 잡겠네”소리가 저절로 나오게끔 했다.

소평교회 예배당과 종탑, 종 바로 밑에 성탄별을 걸었다. 둘째 줄 왼편 넷째부터 오른쪽으로 김성우, 구광본, 구경본 반사, 강재덕 전도사, 김정순, 정재숙, 권순태 반사. 정재용 기자
소평교회 예배당과 종탑, 종 바로 밑에 성탄별을 걸었다. 둘째 줄 왼편 넷째부터 오른쪽으로 김성우, 구광본, 구경본 반사, 강재덕 전도사, 김정순, 정재숙, 권순태 반사. 정재용 기자

양동산에서 몰래 베어온 소나무로 성탄트리를 만들었다. 어른들은 “나무 못 베게 돼 있는데 누가 또 베어 왔나?” 못 마땅해했지만 크게 타박하지는 않았다. 강단 뒷벽에는 ‘축 성탄’이나 ‘메리 크리스마스’ 또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써 붙였다. 16절지(A4 정도 크기) 도화지를 정사각형으로 잘라서 마름모꼴로 세운 뒤, 한 장에 한 자씩 붓글씨로 쓴 글씨였다.

성탄절을 사흘 정도 앞두고는 창고에서 꺼낸 ‘왕(王)별’을 종탑 높이 달았다. 왕별은 굵은 대나무살로 연을 만들 듯 5각형이 되도록 철사로 묶고 겉에 붉은색 문종이를 발라 만든 별이었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이라 밤에는 양초로 불을 밝혔다. 청년들은 찬바람을 뚫고 철제 종탑으로 기어 올라가 별 안에 양초를 갈아 끼웠다. 크고 붉은 별은 동방박사의 별이라도 되는 양 칠흑 같은 밤을 밝혀 멀리서도 잘 보였다.

성탄절 전야는 교회를 넘어 마을 전체의 문화행사였다. 평소에 교회에 다니지 않던 사람들도 자녀들이 출연하는 순서를 보고자 일찍 저녁을 먹고 예배당으로 몰려들었다. 웬만한 집을 빼고는 자신은 교회 출석하지 않아도 자녀들이 나가는 것은 막지 않아 예배당에 한번 안 가본 아이가 없을 정도였다.

예배당은 교실 한 칸 정도의 크기였다. 남향 건물에 북쪽으로 칸을 막아 창고로 사용했다. 그 공간은 성탄발표회 때면 출연자의 입장 통로가 됐다. 관중석에서 강단 쪽으로는 철사 줄을 치고 커튼으로 좌우로 여닫는 막을 만들었다.

첫 출연자는 치마저고리와 바지저고리로 치장한 유아 둘이 나와서 하는 성탄인사였다. 혀짜래기소리로 하는 말에 웃음을 머금고 지켜보다가 마치자마자 우레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엉터리 음악회’ 순서도 해마다 빠지지 않았다. 쳇바퀴에 돌가루 밀가루포대를 발라 드럼을 만들고, 발 스케이트를 철사가 위로 오게 어깨에 얹어 바이올린 흉내 내고, 냄비뚜껑으로 심벌즈 삼고, 빨래판을 숟가락으로 긁었다. 노래는 “탄일종이 땡땡땡 은은하게 들린다”로 시작하는 ‘탄일종’이었다. 3~4학년 여학생들은 “창밖을 보라, 창밖을 보라 흰 눈이 내린다”노래에 맞춰 폴카를 추고, 5~6학년은 하얀 보자기를 둘러쓰고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무용을 했다. 요절이나 연극 대사를 잊으면 앞에 앉아 있던 선생님이 소곤소곤 들려줬으나, 좁은 공간이다 보니 모두에게 다 들렸다.

1970년 5월 강동면 낙산동산에서 5개 교회연합 야외예배를 마치고 아동부 일동 기념촬영하다. 맨 앞줄은 왼쪽부터 김용한 부장, 박정백, 이용백, 이영복 반사. 정재용 기자
1970년 5월 강동면 낙산동산에서 5개 교회연합 야외예배를 마치고 아동부 일동 기념촬영하다. 맨 앞줄은 왼쪽부터 김용한 부장, 박정백, 이용백, 이영복 반사. 정재용 기자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청년들은 예배당 안에서 난로에 고구마를 구워먹으면서 올나이트(all night)를 했다. 새벽 3시쯤, 장작 타는 소리에 꿈결을 헤매고 있을 때 출입문이 열리며 찬 공기가 한꺼번에 예배당 안으로 밀려들었다. 새벽송(頌)을 돌기 위해서 사람들이 몰려든 것이다. 교인들 가정을 찾아다니며 성탄절 관련 찬송가를 부르는 행사였다. 출발은 교회 바로 곁에 있는 새깨댁부터 시작했다. 찬송가는 곡목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기쁘다 구주 오셨네’, ‘우리 구주 나신 날’, ‘저들 밖에 한밤중에’, ‘그 어리신 예수’, ‘그 밝고 환한 밤중에’ 중에서 한 곡이었다. 마당에 얼추 다 들어서면 한 사람이 선창하고 모두가 따라 불렀다. 먼 옛날 유대 땅 베들레헴에 울려 퍼지던 천사들의 찬양 같았다. 노랫소리는 밤공기를 가르며 하늘 위로 흩어지고 금방이라도 별빛 타고 산타클로스 썰매가 내려올 것만 같았다. 안 믿는 사람들도 시끄럽다 불평하지 않았다. 노래가 끝나면 일제히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쳤다. “강아지 크리스마스”라고 덧붙이는 청년도 있었다. 강아지 이름이 ‘메리’ 아니면 ‘워리’이던 시절이었다.

새벽송의 일원으로 다니다가 자기 집 차례가 가까워오면 빠져나와 집으로 와서 초롱을 내 걸었다. 잠자던 아이들도 부스스 일어났다. 방문을 열어젖히는 집도 있었다. 노래가 끝나고 사람들이 웅성웅성 마당을 빠져나갈 때면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청년은 집 주인이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아 마대에 챙겨 넣었다. 금오댁과 금산댁으로 가기 위해 용강댁 논을 가로지를 때면 찬바람에 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열여섯 가정 다 돌고 교회로 돌아오면 얼추 새벽기도회 시간이었다. 청년들은 설교 시간에 코를 골았다.

성탄절 아침 주일학교 예배는 엊저녁 분위기가 채 가시지 않은데다 평소에 교회에 다니지 않던 아이들까지 대만원이었다. 거기다 마음은 성탄선물에 가 있었으니 설교가 제대로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반사(班師)선생님은 연방 입을 앙다물고 검지를 세워 입술에 붙였다 뗐다 했으나 나락 논에 내려앉은 참새 쫓는 격이었다.

드디어 예배가 끝나고 선물잔치가 벌어졌다. 새벽송 돌면서 산타클로스가 받아 온 엿, 사탕, 과자, 건빵 등이었다. 성탄카드도 서너 장씩 나눠줬다. 낯선 미국인이 이름 모를 한국인에게 보낸 카드였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빳빳한 종이, 선명한 색상, 아름다운 그림이 책갈피로 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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