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 에세이 2] 미켈란젤로의 ‘원죄와 낙원 추방’
[성화 에세이 2] 미켈란젤로의 ‘원죄와 낙원 추방’
  • 이동백 기자
  • 승인 2020.12.17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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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8~12, 프레스코스 280*570cm, 바티칸 시스티나예배당
1508~12, 프레스코스 280*570cm, 바티칸 시스티나예배당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창세기 3장 22~23절)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업은 당신이 보시기에 흡족하게 완성되었다. 천지는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적절하게 작동하였다.

창조된 천지는 오롯한 에덴이었다. 에덴은 곧 세상의 이데아였고, 하나님의 로고스였다. 거기엔 가난함도, 불행함도, 천함도 존재하지 않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멜랑콜리도 거기엔 존재치 않았다.

그 에덴에 유혹의 달콤함이 잠입함으로써 하나님의 로고스는 도전을 받고, 에덴의 이데아는 마침내 무너지고 만다.

이브의 원죄, 이는 땅을 정복하라는 메시지를 오해한 데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이 스스로 흐뭇해 할 정도로 아름다운 낙원을 최초의 인간이 허무하게 허물어버린 것이다. 그 대가로 인간이 감당해야 할 고통은 자욱한 깊음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아담의 원죄와 낙원 추방을 하나의 도상에 옮겨 놓고 있다.

원죄의 공간에서 아담은 유혹에 동참하는 듯도 하고 저항하는 듯도 하다. 그 속내가 애매하다. 미켈란젤로는 아담의 심리적 갈등을 이런 모습으로 구체화한 것이리라. 이런 아담이 추방의 공간에서는 마뜩찮은 표정을 짓는다. 아담의 추방은 불현듯 당한 일이라서 순순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터, 이브에게 원망하는 마음이 왜 없었을까. 이미 눈이 밝아져버린 아담이 아닌가. 아담의 마뜩찮음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반항은 아니다. 믿었던 연인에 대한 불만이다.

이브는 원죄와 추방의 공간 사이에서 극명하게 대비를 이룬다. 원죄의 공간에서 취한, 비스듬히 누운 이브의 포즈가 우선 관능의 어디쯤에 머문 듯하다. 돌린 고개와 뻗은 팔과 더불어 유혹에 쉽사리 넘어갈 포즈이다. 뱀이 쳐놓은 유혹의 덫에 감겨드는 순간에 미켈란젤로의 붓은 이렇게 움직인 것이다.

이에 비해 추방의 공간에서 이브는 몸을 쪼그라뜨린 채 아담의 뒤에 숨느라 여념이 없다. 해맑던 이브의 피부가 아담의 그림자에 묻혀 어둡고 칙칙하다. 이브의 마음이 그러했으리라.

추방당하는 순간의 부끄러움은 이브의 손길에 머물러 있는데, 이브의 눈길은 아직 뱀에서 떠나질 못하고 있다. 낙원 안의 삶에 대한 짙은 노스탤지어가 베었다. 망해가는 소돔과 고모라성에서 보여준 롯의 아내처럼 이브는 집착과 미련을 황량하기 그지없는 실낙원에서도 지워내지 못하고 있다. 흘러간 것은 아름다운 법이다. 그것도 낙원이 아니던가. 신성(神性)을 잃은 이브의 마음을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읽어낸 것이다.

원죄와 추방의 공간을 가른 것은 뱀과 하나님 여호와이다. 뱀은 반인반수여서 뱀으로서보다는 사탄의 이미지가 강하다. 여호와 하나님은 붉은 옷차림의 사람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내린 심판의 엄혹함을 드러내기 위해 화가는 붉은 물감에 붓을 적셨을 것이다. 그 붓끝에 실린 분노는 아담의 목을 파고드는 여호와 하나님의 칼끝만큼이나 예리했으리라.

유혹은 달콤하다. 그러나 유혹의 열매는 쓰고 아프다. 인류가 겪어낸 최초의 경험은 이렇듯 달콤하면서도 쓰고 아팠다. 이 달콤한 아픔은 자욱하게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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