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근대골목] 대구에도 일본인이 지은 절이 있다고요?
[대구근대골목] 대구에도 일본인이 지은 절이 있다고요?
  • 안영선 기자
  • 승인 2020.12.1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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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로의 여행 삼덕봉산문화길의 둘째 구간은 관음사인데 관음사는 일제강점기 때 대구 중구 산덕동에 지은 일본식 사찰로 기록에 의하면 1916년 일본인 승려에 의해 창건되고 1919년 동양척식회사의 상무이사가 희사했다고 하는데 창건당시의 사찰 이름은 선림사 였는데 1968년 동화사 원명스님이 주지로 오면서 관음사로 이름을 바꿨다. 현제 조계종 산하 송광사의 말사다.

관음사 전경

관음사에 가려면 삼덕소방서 맞은편에서 경대병원 쪽으로 150여 미터에 있으며 공평로 8길 15에 있는데,  본당의 초석은 대구의 읍성돌 200여개를 사용하여 쌓았다. 밖에서 보면 한옥의 가정집 같이 보이지만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일본식 건축 방식이 여러곳에 남아 있다. 본당을 정면 3칸 측면 7칸으로 팔작지붕의 박공부가 정면인데 박공단부의 삼각형의 모서리는 현어(懸魚)로 장식되어 있는데 경주의 서경사 현어와 많이 닮았다. 용마루와 처마는 직선이며 서까래는 수평으로 배치되었고 단청은 하지 않았다.

1910년대  이 일대는 논밭인 대구의 읍성 동쪽 외곽이었는데, 신작로를 내고 법원, 형무소, 세무감독국을 설치하면서 도청, 우체국, 검찰청 등의 관사가 만들어 지면서 절이 만들어 졌다. 본당의 현판은 무설전인데 그 앞에 일본식 석등이 하나 있다. 석등의 옥개석 끝이 고사리처럼 말려 있는 '카스가 석등'이다 카스가 석등은 일본에 많이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은데 석등에는 전구를 달아 불을 밝힌 흔적이 남아 있다.

화단에 있는 카스가 석등

화단에는 몇개의 석조물과 양염을 돌로 갈아 사용하는 돌확도 있는데 절집이 6.25전쟁 때는 경찰의 주둔지가 되기도 했으며 일본인이 떠난 뒤에는 그의 폐허에 가까웠으나 1968년 원명스님이 올 때 관음사 재산은 연탄 3장이 전부 였다고 한다. 그 연탄도 탄것 한장, 덜 탄 것 한장, 안 탄것 한장에서 40년이 지난 지금은 요사채가 증축되고 무료급식도 하며 불자의 집을 운영하며 주민들에게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관음사 무설전

광복후 남한에만 일본식 사찰이 120여개남아 있었는데 그 중 원형이 남아 있는 곳은 세 곳 정도로 근대의 문화유산으로 지정 되어 있다. 관음사도 많은 곳이 변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부수고 다시 짓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원명스님은 "누가 지었던 어떻게 멀쩡한 건물을 부수고 또 신도들에게 시주금을 내라고 할 수 있느냐" 하며 보전했다고 한다.

관음사를 나오면서 공평동은 법원등의 건물과 관사들이 있었으니, 공평하게 공무원이 일을 처리 하라는 뜻으로 동 이름을 지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삼덕동은  번뇌를 끊어버리라는 단덕(斷德), 지혜로서 있는 그대로를 보는 지덕(知德), 은혜를 베푸는 은덕(恩德) 삼덕을 생각하면서 하루하루를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