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㊳토끼와 더불어 이겨낸 가난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㊳토끼와 더불어 이겨낸 가난
  • 정재용 (엘레오스) 기자
  • 승인 2020.12.11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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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유신, 100억불 수출, 1000불 소득’에 기여한 토끼
호시탐탐 노리던 족제비
토끼듯 달려온 나날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에 ‘10월유신’(十月維新)을 선포하고, 11월 21일 국민투표를 실시, 12월 27일 제8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제4공화국의 출범이었다. 그때 표어가 ‘10월 유신, 100억불 수출, 1000불 소득’이었다.

1972년 연간수출액은 16억불, 1인당 국민소득은 320불이었다. 새마을운동은 1969년에 시작됐다. 1972년에 나온 ‘새마을노래’는 스피커를 타고 대한민국의 아침을 깨웠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는 국민적 구호였다. 모두가 허리춤을 추스르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소득증대’, ‘수출증대’이라는 단어는 ‘반공방첩’과 더불어 보통어가 됐다. 붓글씨체의 표어가 농협창고 건물 외벽에는 가로로 크게 쓰이고, 학교나 마을 게시판에는 세로글씨의 종이가 나붙었다. 학교에서는 묘포(苗圃)장을 만들어서 밤나무 묘목을 길러 식목일이면 가까운 산에 옮겨 심고 빈터에는 토끼장을 짓고 토끼를 먹였다. 방학 때는 반별로 몇 명씩 토끼당번을 정해서 풀을 뜯어 먹였다.

소평마을에도 처녀의 머리채를 사려는 장수가 수시로 들어왔다. 가발공장으로 넘긴다고 했다. 봉제(縫製)공장으로 일하러 가는 사람도 있고 포항 수산물 공장으로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틈만 나면 보릿짚을 땋았다. 맥고모자를 만드는 재료였다. 소득증대 사업 중 하나는 토끼 기르기였다. 토끼는 기르기가 쉽고 번식력도 좋아서 인기가 있었다. 고기 먹고 가죽 팔고 일석이조였다.

토끼하면 집토끼와 산토끼 정도만 알던 사람들이 분양을 받으면서 앙고라, 친칠라 등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앙고라는 터키가 원산으로 수도 앙카라의 옛 이름에서 왔다고 했다. 흔히 “앙골라”라고 불렀다. 앙고라는 흰색으로 털이 많고 친칠라는 회색이었다. 친칠라는 프랑스 원산으로 앙고라에 비해서 털이 적은 대신 모피로 많이 활용됐다. 그 동안 집토끼는 보통 흰색이고 어쩌다 양동산에서 잡은 산토끼를 보면 갈색이었다.

겨울 들판과 마을 동편의 양동산. 겨울에 대비하여 소먹이로 쓸 건초를 미리 말려 두어야 했다. 이 풀을 토끼에게도 먹였다. 정재용 기자
겨울 들판과 마을 동편의 양동산. 겨울에 대비하여 소먹이로 쓸 건초를 미리 말려 두어야 했다. 이 풀을 토끼에게도 먹였다. 정재용 기자

토끼 먹이기는 쉬웠다. 어차피 소풀은 해야 하는 것, 그 중의 일부를 토끼장에 넣어주면 됐다. 토끼장은 사과나무 궤짝을 이용해서 만들었다. 긴 쪽의 한 면을 반으로 나눠 반은 철사 그물로 하고 나머지 반은 여닫이문으로 만들면 됐다. 토끼장 하나에 암수 한 쌍을 넣었다. 토끼는 질경이, 콩잎, 바랭이를 잘 먹고 소가 먹는 풀은 다 잘 먹었다. 그 중에도 씀바귀를 가장 좋아했다. 마을사람들은 씀바귀를 ‘신냉이’라고 부르고, 질경이를 ‘뺍자구’, 클로버를 ‘토끼풀’이라고 불렀다. 신냉이는‘쓴맛이 나는 냉이’라는 뜻이었으나 클로버가 토끼풀이라 불리는 까닭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냥 ‘토끼가 잘 먹기 때문에’ 정도로만 알았다.

서리가 내리면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졌다. 토끼는 마른 바랭이를 넣어주어도 잘 먹었다. 겨울에는 건초와 김장하고 남은 무, 배춧잎을 주고 소죽을 쑤어서 외양간으로 가져가는 길에 토끼에게도 주었다. 잘바가지(자루 붙어있는 바가지)로 퍼 담아 주면 김이 나는 그릇에 달려들어서 맛있게 먹었다. 먹다 남은 소죽은 혹독한 추위에 이내 얼어서 그릇에 엉겨 붙었다. 그때면 수시로 먹을 수 있게 밀이나 보리를 주었다.

토끼장은 여름에는 잿간 밖에 시렁을 만들어 그 위에 두고 겨울에는 잿간 안에 들여 놓았다. 아이들은 모기 때문에 잠을 못 이뤄 토닥거리던 토끼 발자국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다. 멀방(안방 옆방)과 토끼장 간 거리는 어른 양팔 간격이었고, 모기장으로 트여 있어서 조그만 소리도 그대로 들렸다. 가끔 깩깩 죽는 소리를 내는 것은 수컷에 눌린 암컷이 내는 소리였다.

농촌에서 족제비는 유목민에게서 늑대 같은 존재였다. 심심찮게 홰에 앉은 닭을 물어가고 토끼를 물어갔다. 농부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잿간 문은 제대로 닫혔는지 토끼장 문의 고리는 벗겨질 염려가 없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한번은 밤새 족제비가 촘촘한 철망을 주둥이로 벌리고 토끼의 머리를 물고 당기는 통에 몸뚱이만 남은 토끼가 토끼장에서 발견됐다. 나중에 쥐틀에 족제비가 잡혔는데 그놈이 그놈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토끼의 앞니는 평생 자라기 때문에 늘 뭔가를 갉아야만 했다. 토끼장의 판자는 너무 촘촘하면 배설물이 밑으로 안 떨어지고 그렇다고 벌려 놓으면 갉을 틈이 됐다. 갉은 틈은 양철로 때웠다.

없는 살림에 쇠고기나 돼지고기는 귀하고 토끼는 닭만큼이나 부담이 적어서 손님이 오거나 가족 생일이면 잡아먹었다. 무 썰어 넣고 달달 볶아 먹으면 가장 맛있지만 많은 식구가 먹으려면 국으로나 고아먹는 게 제격이었다. 가을걷이를 끝나면 두어 마리를 한꺼번에 고아서 일곱 식구가 포식을 했다.

마을의 서쪽 길, 집 밖으로 나서면 어디 든 풀이었다. 농로 따라 도랑이 있고 도랑은 고마리와 여뀌 풀로 덮여있었다. 토끼가 좋아하는 질경이와 토끼풀은 길바닥에 많았다. 정재용 기자
마을의 서쪽 길, 집 밖으로 나서면 어디 든 풀이었다. 농로 따라 도랑이 있고 도랑은 고마리와 여뀌 풀로 덮여있었다. 토끼가 좋아하는 질경이와 토끼풀은 길바닥에 많았다. 정재용 기자

겨울을 앞두고 토끼는 털갈이를 했다. 방한용 솜털이 났을 때 잡아야 가죽을 제 값 받고 팔 수 있었다. 토끼를 잡고, 가죽을 칼로 벗겨내고, 털이 안으로 가게 나무판자에 탱탱하게 펼쳐서 못으로 박는 일은 모두 아버지의 몫이었다. 토끼를 잡는 일은 기술도 기술이지만 생명을 끊는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뒷다리 두 개를 한 손에 잡고, 공중으로 휘둘러, 땅바닥에 내리쳐서 죽였다. 사촌댁의 황병윤 씨는 어른이면서도 죽이지를 못해 남을 시켜서 잡고, 잡는 사람이 토끼 뒷다리를 한 손에 모울 때면 부리나케 두 귀를 틀어막고 뒤뜰로 도망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럴 경우 껍데기는 잡는 사람에게 줘야 했다. 가죽이 바짝 마르면 장에 내다 팔거나 팔지 않고 귀마개나 목도리를 만들어 착용했다. 눈 덮인 어래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살을 에듯 찼다.

토끼의 흘레붙는 시간은 닭만큼 짧은 대신 잦았다. 교배 후 한 달이 지나면 새끼를 낳았다. 털을 뽑아서 바닥에 깔면 새끼 낳을 때가 임박했다는 신호였다. 그러면 거적으로 토끼장을 덮어주었다. 안 그러면 새끼를 물어 죽이는 경우가 있었다. 새끼는 보통 일여덟 마리를 낳고 열 마리를 낳을 때도 있었는데 한 주 정도 지나면 눈을 떴다. 새봄을 맞아 마당에 내 놓으면 장난감처럼 돌아다녔다. 빠끔한 눈에 오물오물 토끼풀을 먹는 모습은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희망찬 새봄이었다.

지금은 연간수출액 6천억 불(2018년),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불(2018년)로 1972년 수출액의 375배, 국민소득은 94배에 이르고 있다. 올해 국가별 명목별 GDP(Gross Domestic Product, 國內總生産)는 미국, 중국, 일본, 독일, 영국, 인도,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에 이은 세계 10위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 동안 산토끼가 안 잡히려고 도망치듯 달려온 셈이다. 이런 도망을 흔히 “토낀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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