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 매향비가 있는 경남 사천여행
[우리 산하] 매향비가 있는 경남 사천여행
  • 이승호 기자
  • 승인 2020.12.09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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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포가 아니라 사천이라 불러다오!
녹차나무가 많은 적멸보궁 다솔사.
녹차나무가 많은 적멸보궁 다솔사. 이승호 기자

낙엽도 떨어지고 쌀쌀한 날씨에 코로나19 3차 유행으로 답답하고 스산한 마음을 달래려 경남 사천으로 떠났다.

다사(茶寺)의 다솔사, 매향비, 왜성인 선진리성과 정유재란의 조명군총을 다녀왔다. 경남의 남서쪽 사천만을 끼고 북쪽은 산악으로 둘러친 사천은 조선 말기까지는 사천군이었다. 1956년 사천군에서 삼천포시가 분리되어 나갔으나, 1995년 다시 통합되면서 삼천포시가 아닌 사천시로 되었다. 주민투표 결과 인구는 삼천포시가 많았으나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이 듣기 거북하다고 사천시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사천은 바다와 육상, 하늘길이 연결되는 경남 서부지역 교통의 요충지이다. 청정바다의 싱싱한 해산물과 한려수도의 비경을 감상 할 수 있는 유람선 관광, 사천바다케이블카, 항공우주박물관, 솔섬, 비토섬, 월등도, 토끼섬, 거북섬으로 이어지는 약 8km의 환상적인 드라이브 코스 등 풍부한 관광자원과 문화유산이 있는 고장이다.

다솔사(多率寺)

경남 사천시 곤양면 용산리 봉명산 아래 있는 다솔사(多率寺)는 소나무가 많다는 뜻이 아닌 군사가 많다는 뜻이다. 신라 지증왕 4년(503) 연기조사가 영악사로 창건하고 이후 선덕여왕 때 다솔사로 절 이름이 바뀌었다. 통도사, 봉정암, 상원사, 법흥사, 정암사 이상 5대 적멸보궁과 용연사, 도리사, 금산사, 장안사, 건봉사. 대원사와 함께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사찰이다.

대웅전에는 부처님이 없고 불탑이 보인다. 현판도 대웅전이 아니라 적멸보궁이다. 적멸보궁 뒷편 야산에는 넓은 녹차밭이 있다. 그런고로 '다사(茶寺)'로 불리우는 이 절은 '반야로차'가 유명하다. 이곳 차나무는 다른 지역 보다 빨리 자라 다른 지역에서 차나무가 움틀 무렵이면 여기서는 차잎을 딴다고 한다. 값이 다소 비싸지만 이 지방의 명품 차로 인기가 있다고 한다.

다솔사 왼쪽 오솔길을 약2km 오르면 경주 토함산 석굴과 유사한 우리나라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고려시대 석굴인 보안암 석굴이 있다. 다소 힘드시겠지만, 꼭 가 보실길 권한다. 이 절은 김동리의 '등신불'의 배경이기도 하다. 김동리는 1936년 부터 5년 동안 다솔사에 머물며 광명학원이라는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펼쳤다. 대양루에서 수업했으며, 당시 이 지역에서 모인 청년학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다솔사 들어가는 진입에는 측백나무, 삼나무, 소나무가 어우러져 녹색의 솔향 가득한 숲길은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다. 차도와 분리된 안전한 데크로드이다. 입장료와 주차료는 없다.

그 옛날 바닷가에 향을 묻고 소원을 기원했던 매향비.
그 옛날 바닷가에 향을 묻고 소원을 기원했던 매향비. 이승호 기자

매향비(埋香碑)

사천 매향비(埋香碑)는 곤양면 흥사리에 있다.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에 향을 묻고 마을의 안녕과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민간신앙의 일환이었다. 당시 향을 땅에 묻고 복을 축원하는 매향 행위가 여러 지역에서 행해졌을 것이다. 은밀하게 실시된 민간신앙이므로 비석 수는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고려 충선왕1년(1309) 강원도 삼일포 매향비, 조선 태종5년(1405) 전남 신안군 암태도 매향비, 세종9년(1427) 충남 서산 해미 매향비가 있다.

이 매향비는 인적 드문 낮은 산기슭 비각 안에 있다. 가로 세로 1.2m, 높이 1.6m의 화강암 바위이다. 바위 앞면에 새겨진 글자는 모두 15행 202자 인데 투박한 글씨와 정렬되지 않은 점이 민간에서 만들었음을 유추 할 수 있다. '천인결계매향원왕문'이라고 시작되는 비문은 '고려 우왕 13년(1387) 국운이 쇠퇴하자 승려와 이 지방 불도 4,100명이 해안이었던 이곳에 향을 묻고 국태민안과 미륵보살의 하생을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미륵불에게 내세의 복을 기원한 것 외에도 국태민안을 기원한다는 구절로 미루어 고려 말 해안가에 왜구의 피해가 극심했던 사회상을 알 수 있다. 비문은 고려 때 고승 달공이 짓고, 수안이 썼으며, 김용이 새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보물 제614호 이다. 아쉬운 점은 안내 표지판이 없다.

정유재란 때 조선과 명나라의 전사자의 무덤인 조명군총.
정유재란 때 조선과 명나라의 전사자의 무덤인 조명군총. 이승호 기자

조명군총(朝明軍塚)

사천 선진리왜성 가기전에 있다. 넓은 영역에 큰 무덤이 보인다 이곳이 조명군총이다. 무덤의 호칭 중 총(塚)은 무덤의 크기가 커서 일반인의 무덤은 아니고 왕이나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나 주인을 알 수 없는 경우, 예 천마총, 금관총, 장군총, 서령총. 또 다른 경우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여러 사람의 합장 무덤, 예 조명군총, 신미순의총이 있다. 조명군총은 정유재란 이 끝날 무렵, 왜군과의 협상이 결렬되자 조선과 명나라는 여러 방면에서 왜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 중 사천은 중로군의 작전지역으로 정기룡 정군과 명나라 동일원 장군은 1598년 10월 1일 선진리왜성에 주둔하고 있던 시마즈 요사히로와 결전을 벌인다. 전투 초기 왜군을 섬멸 직전까지 몰아넣었으나, 연합군 진영에서 화약궤가 터지면서 혼란에 빠져 결국 8천여 명의 전사자를 남긴채 대패하였다. 이 때 전사한 조선과 명나라 군사의 합장한 무덤이다. 깔끔하게 정돈된 묘역에는 전시관과 일자 형의 일자각 재실과 이총 조형물이 있다. 입장료와 주차료는 없으며, 주차장은 여유롭다.

사천선진리성(泗川船津里城)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공원길 해변을 끼고 있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왜성 중 순천왜성과 함께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왜성은 물자공급을 원활히 하기 위해 모두 바다를 끼고 있다. 성곽은 90도가 아니라 약70~80도로 기울어 쌓았으며, 미로처럼 복잡한 구조를 하고 있는 점이 우리나라 성곽과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이 선진리왜성은 1592년 5월 29일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최초로 출전사켜 왜군을 패퇴시킨 역사적인 현장이며, 정유재란 당시 직산전투와 명량해전에서 대패한 왜군은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기까지 30여 개의 왜성을 증축 및 신축하여 항쟁에 들어갔다. 선진리왜성은 모리 요시나리에 의해 기존 고려시대 토성을 토대로 신축한 왜성이다. 이 성은 조명군총이 위치한 동쪽부분만 육지와 연결되어 있고 삼면은 바다로 둘러쌔여 있는 천혜의 군사적 요충지로 고려시대에는 12조창 중 하나인 통양창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매년 4월 초에 가면 200여 그루의 벚꽃이 장관을 이룬다. 입장료 주차료는 없으며, 조명군총 아래 바닷가에는 횟집단지가 있다. 조명군총에 주차 후 걸어서 가면된다.

최상의 드라이브 코스 비토섬 토끼와 거북, 별주부전의 전설이 있는 비토섬은 비토교에서 월등도까지 차로 갈 수 있다.

날 비(飛), 토끼 토(兎)자로 토끼가 날아올랐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비토섬은 '별주부의 고향'인 만큼 토끼를 빼닮은 토끼섬, 납작 업드린 거북 모양의 거북섬과 물이 빠지면 본섬과 연결되는 '모세의 기적' 현상을 볼 수 있는 월등도까지 약8km의 거리는 어촌마을의 정겨운 풍경과 눈부시다 못해 시릴 만큼 푸른 바다와 황홀한 일몰 일출을 감상 할 수 있는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다.

토끼섬과 거북섬에 관한 전설은 그 옛날 육지로 돌아오던 토끼가 월등도 앞바다에서 달빛에 반사된 육지를 보고 성급히 뛰어내리다 바닷물에 빠져 죽었다. 그 자리에는 토끼모양의 생겨나서 토끼섬, 토끼를 놓친 별주부는 용왕으로부터 벌 받을 것을 걱정하여 용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거북모양의 섬이되었다는 다소 황당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비토섬을 마지막으로 하루 일정을 마쳤다. 짧은 낮 시간 동안 모두 가보려니 쉴시간 없이 다녔다. 다리도 아프고 피곤하지만, 뜻 맞는 동료들과 함께 했기에 마음은 편하고 기분은 더없이 좋다.

토끼와 거북이의 전설이 전해지는 비토섬, 하루 두번 물길이 열린다.
토끼와 거북이의 전설이 전해지는 비토섬, 하루 두번 물길이 열린다. 이승호 기자

tip: 사천비토식당(010-2890-8750) 비토섬 입구 바닷가 분위기 좋은 곳에 있다. 아구탕, 조개구이 등 각종 바다해물로 만든 요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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