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 (70) 높임말 과용 시대의 유감
[말과 글] (70) 높임말 과용 시대의 유감
  • 조신호 기자
  • 승인 2020.12.0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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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9일 제574주년 한글날을 맞이했다. 해마다 한글날이 되면, 우리말을 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린다. 올해는 각종 공문서에 외래어가 양산되고 있다는 뉴스가 대서특필되었다. 정부가 우리말 순화를 위한 행정 지침을 정해 놓고도 앞장서서 지키지 않는 현실이다. 왜 그 악순환을 끊을 수 없을까?  

몇 년 전에 백화점, 홈쇼핑, 등 유통업계에서 잘못된 높임말을 고치려고 애쓴 적이 있었다. 언어순화에 역행하는 표현들, 예를 들면 ‘그 사이즈는 없으십니다.’ ‘포장이세요?’ ‘이 상품은 품절이십니다.’ ‘커피 나오셨습니다.’ ‘고장이 나시면 환불해 드립니다.’ 등을 개선하고자 했다. 밑줄 친 부분은 사물에 높임말을 사용한 비문법적인 표현이다. 변형생성문법에 의하면,  문장의 각 어휘 항목이 공기(共起)할 때 적용되는 규정인 선택제한(選擇制限) 위반이다. 예를 들어, ‘그 책이 울었다.’ 라는 문장에서, ‘책=울었다’ 문법에 맞지 않는 비문(非文)이다. 동사 ‘울다’는 반드시 사람이나 동물에 해당하는 주어에 연결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서술어 선택에 제한점이 내포되어있으므로, ‘책’과 같은 무생물 명사와 연결(共起)할 수 없다. 시어(詩語)에는 예외이나, 일상어에는 그렇지 않다. ‘커피 나오셨습니다.’ 주어와 술어의 불일치시키면서 고의적으로 말을 비틀어 놓은 잘못된 언어현상이다.

제574주년 한글날을 맞이한 2020년 이 시대에, TV에 " ○○께서 ○○○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라는 과도한 높임말이 범람하고 있다. 점원, 민원 담당자, 의료 종사자 등 어떤 불특정 관계자의 말을 전달하는 과정에 이런 표현이 과용되고 있다. 젊은 세대들 뿐만 아니라, 대부분 시민들이 이렇게 말한다. 이런 과도한 높임말 현상과 함께 30대는 물론 20대에게도 ‘어머님!’ ‘아버님!’이라고 말하는 과도 호칭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도 거침없이 ‘어머님! 아버님!’ 이라고 해야 된다는 강박관념 속에 살고 있다.

왜 이러한 과도한 높임말 현상에 압도되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는가? 그 원인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사회·문화적 배경의 변화에 들어 있다. 대표적인 것은 바로 우리 사회의 ‘관계 불안 현상’ 이다. 무분별한 악플로 인한 연예인의 자살, 수시로 쏟아지는 정치인들의 비난, 증오, 저주의 말이 무의식적으로 누적되면서 인간관계의 불안이 심화되었을 것이다. 툭하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고소, 고발이 난무하는 현상도 무시할 수 없다.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평범한 시민들도 무의식적으로 보이지 않는 피해 의식이 누적될 수 밖에 없는 피해자가 된다. 

이러한 관계불안 현상이 평범한 시민들의 언어에 과도한 높임말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언어는 사회 문화적 배경에서 생성-소멸을 거듭하며 변화한다. 인간관계는 말로 시작해서 행동으로 연결되므로, 불시에 닥치게 될 난처한 일에 대한 방어막, 최소한의 방패가 바로 높임말로 등장하게 되었다. 무의식적인 보호 장치인 높임말이 중복되는 과도화하 현상은 당연한 일이다. 한 가지로 부족하니 이중(二重) 방어막을 만들어야 그나마 안심할 수 있다. " ~께서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라는 표현은 분명 이중 높임말, 이중 방패막이다.

40, 50년 전의 대학생들은 과제물 표지에 ①강의과목 ②제출 날짜, ③담당: OOO교수 라고 적었다. 직접 대면하는 호칭은 'OOO교수님'이지만, 간접적인 지칭은 'OOO교수'로 구분하는 것이 올바른 어법이다. 그러나 요즘은 지칭에도 무조건 ○○○교수님 이라는 사회적으로 강요된 불문율이 압도적이다. 어떤 대학의 교수 연구실 명패도 'OOO교수님'로 부착된 것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 과도한 언어 방어막에서 비롯된 ‘관계 불안 현상’의 그림자이다. 좋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하는 말과 행동이 불일치 현상이다.

믿음(信)은 사람 인(人) + 말씀 언(言)으로 형성된다. 사람과 말이 일치할 때, 믿음이 형성되는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언행일치가 올바른 인간관계이고, 인간관계의 척도이다. 언행 불일치는 불안한 관계 또는 존재의 파탄이다. 강요된 높임말 사용은 ‘나는 없고 다른 사람들의 그림자가 나를 점령하고 있는’ 기현상(奇現象)이다. 그걸 내 자신으로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 그 강박관념은 더욱 안타까운 결과이고, 현대 한국인들의 불행이다. (*)